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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ees

장-마리 뱅상 파리 8대학 교수-9.11테러

by gino's 2012. 2. 23.
파리대학 유학시절 지도교수님이기도 하신 분이다. 영화배우 뺨치는 수려한 용모에 프랑스의 대표적인 정치사회학자이지만, 늘 청바지에 셔츠 차림으로 학교에 나오셨다. 진정한 석학이시다. 자신과 비슷한 연령대의 프랑크푸르트학파를 전공하셨고 말년에는 피에르 브르디외와 위르겐 하버마스 사회학을 비교연구하셨다. 하버마스가 파리를 방문했을 때 당시 사회당 출신 리오넬 조스팽 총리가 하버마스에게 만나달라고 청했는데, 하버마스가 "친구를 만나기로 해서 안된다"며 거절한 적이 있는데 바로 뱅상 선생이 그 친구였다. 술을 드시면 말술이고 8대학 근처 몬테네그로 음식점을 좋아하셨다. 안타깝게 몇해전 수술을 받던 도중 돌아가셨다.


[석학과의 대화]佛 정치사회학자 장 마리 뱅상

 

지난 11일 미국 뉴욕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 국방부 청사(펜타곤)를 덮친 동시다발 테러의 여진(餘震)이 열흘 넘게 세계를 흔들고 있다. 혼란과 긴장은 지구촌 곳곳에서 엿보인다. 서울 거리에서마저 무장 경찰관들이 이례적인 풍경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테러리즘과의 ‘새로운 전쟁(The New War)’을 선언하고 난 뒤 각국은 신속하게 ‘헤쳐 모여’를 하고 있다. 미국편인가, 테러편인가의 양자택일을 하라는 미국의 주문 때문이다. 이러한 가운데 미국의 가공할 군사력이 집결하면서 걸프해역과 인도양에는 전운(戰雲)이 짙어지고 있다. 세계가 새로운 불확실성의 시대에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때마침 서울을 찾은 프랑스의 저명한 정치사회학자 장 마리 뱅상 교수(파리8대학)를 지난 20일 만나 테러사태를 보는 유럽 지식인의 목소리를 들어보았다.

-사상 유례없는 테러가 미국에서 발생한 이유는 무엇인가.

“테러범들은 세계의 중심에서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하고 싶었던 것 같다. 미국은 서구 강대국들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제국(L’empire mondial)’의 중심인 동시에, 그 서구 강대국들마저 지배하는 이중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테러는 미국을 분해하기는커녕 서방세계 전체를 단결시키고 있다. 7,000여명의 무고한 인명만이 희생됐을 뿐이다. 테러범들은 사람의 목숨을 목적을 위한 1차적인 재료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국제질서에서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테러범, 무고한 人命만 제물삼아-이번 테러가 미국의 세계 패권과 세계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리라 생각하는가.

“미국의 국가적 위신에 타격을 주었을 뿐이다. 하지만 망신을 줬다고 해서 미국의 유일무이한 세계지배 구도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국제정치 독트린이나, 세계화의 추세를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한다. 물론 약간의 방향수정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테러가 다른 많은 현안들을 잊게 했다는 점이다. CNN이나 BBC월드를 보고 있으면, 미국의 군사작전 준비상황을 제외하곤 다른 뉴스가 거의 안보인다. 이런 점에서 세계화의 부작용을 지적하던 사람들의 노력을 후퇴시켰다”

-반(反)세계화 운동에 타격을 주었다는 의미인가.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미국의 세계 지배에 저항해온 노력을 후퇴시켰다. 시애틀에서 시작해 프라하, 니스, 제노바에서 시위했던 사람들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세계화의 문제점과 국제관계의 맹점들을 보여주려고 시도하지 않았던가. 테러행위와 미국의 예상되는 공격은 반세계화 담론을 중단시켰다. 오히려 ‘미국과 테러간의 싸움’이라는 지극히 제한적이고 폐쇄적인 대결국면으로 축소시켰다. 테러는 세계의 중심을 겨냥한 상징적인 행위였을 뿐이다. 실질적인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이는 테러범들에게 정치적 판단력이 부재했음을 증명한다.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상징에 근거해서만 행동하는 것 같다”

-테러의 배후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라고 보는가.

“범인들의 행동양식을 보면 그렇다. 오사마 빈 라덴이 아니더라도 그의 조직과 접촉했다는 사실은 분명한 듯하다. 상당한 재정기반이 있어야 가능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번 사건은 특히 1970~80년대 서독정부와 극좌파 테러집단 바더마인호프그룹의 대치상황을 연상케한다. 그들은 사람을 죽이는 테러가 서독정부에 대한 공격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테러는 국가를 파괴할 수도, 국민의 사기를 꺾을 수도 없었다”

-아랍권에는 왜 반미주의자들이 많은가. 이스라엘의 존재 때문인가, 아니면 미국이 민주주의와 진정한 경제발전을 돕지 않아서인가.

“더 심각한 이유 때문이다. 미국이 아랍권 내 퇴행적인 세력들을 지원, 결과적으로 역사 발전을 후퇴시켜온 게 문제다. 미국은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에서 이슬람주의를 옹호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주요 지지국이다. 사우디는 미국이 아랍권내에서 ‘미국의 법’을 관철시키는 것을 도왔다. 미국은 90년대 초에는 내전중이던 아프간의 여러 정파 중에서 가장 반동적인 탈레반을 지지했다. 파키스탄과의 관계와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의 원유 때문이었다. 테러의 배후로 지목되는 사우디 출신 빈 라덴이 미 중앙정보국(CIA)을 위해 일했던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빈 라덴은 타국에 해악을 끼쳐온 미국 스스로의 이미지를 미국에 되돌려주었다. 탈레반과 미국에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국제적인 차원에서 아무런 변화를 시도하지 않으면서,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유일한 국가로 남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테러에 대한) 미국의 책임 또한 외면할 수 없다”

-미국이나 호주에선 이슬람계 주민들이 공격을 받고 있다. 일각에선 새뮤얼 헌팅턴이 말한 ‘문명의 충돌’이 새삼 거론되고 있는데….

“‘문명의 충돌’이라는 개념은 현재 세계상황을 볼 때 100% 잘못된 분석이다. 프랑스에만 3백만명의 이슬람교도가 있고, 미국에도 상당수가 있다. 이들이 다른 주민들과의 관계에서 종교간·문명간 전쟁을 의식하고 있을 것 같은가. 아니다. 심지어 아랍세계에 사는 사람들도 기독교도나 서방과 전쟁 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아랍인들의 서방세계에 대한 증오는 상당히 강하다. 많은 아랍인들에게 서방은 개인적 비참함과 모멸감, 거만함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두고 문명간 전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회적 갈등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국제관계에서도 갈등구조일 뿐이다. 전쟁은 아니다”

-미국의 보복전에 대한 신중론도 만만치 않다. 부시 대통령이 말한 ‘새로운 전쟁’을 어떻게 보는가.

“우선, ‘전쟁’이라는 용어를 거부해야 한다. 수천만명이 숨진 2차세계대전을 생각해보라. 미국에 대한 전쟁은 없었다. 미국인들은 벌써 일상으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CNN은 미식축구 소식을 전하고 있다. 90년대 이후 파리 지하철과 거리, 백화점 등에서 폭탄테러가 있었지만 누구도 전쟁을 거론한 적은 없다.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테러라는 점에선 본질적으로 같다. 미국 정부가 전쟁을 거론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과장이다. 도대체 누구를 상대로 하는 전쟁이란 말인가. 빈 라덴이 배후라는 명확한 증거도 아직은 없다”

‘보복 전쟁’만 부각…‘본질’ 외면-미국의 대응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인가.

“파키스탄은 이미 심각한 국내 저항에 직면하고 있다. 미국의 공격이 시작되면 반미시위는 전이슬람권으로 확산될 것이 분명하다. 미국은 ‘테러만이 문제’라면서 그에 대한 승리에 집착하고 있다. 그러나 테러나, 이에 대한 미국의 보복전쟁이나 세계차원의 갈등구조를 바꾸지는 못한다. 미국과 유럽, 미국과 아시아의 관계가 변하겠는가. 아니면 국가간 빈부격차 문제가 해결되겠는가. 양쪽이 구사하는 어휘에는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다. 빈 라덴은 미국을 ‘거대한 사탄’이라고 지칭했고, 부시는 ‘우리는 선과 악의 전쟁에 직면했다’고 말했다. 빈 라덴이나 미국이나 모두 ‘상징적인 대치상황’에 갇히려고 한다”

-이번 테러로 초래된 국제적인 혼란상황이 얼마나 지속될 것으로 보는가.

“상당기간 계속될 것으로 본다. 미국의 ‘비대칭적인’ 보복의지는 이미 세계경제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미국은 당장은 아니더라도 조만간 국제적 리더십의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다. 이는 더 많은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테러를 낳게 한) 세계화와 국제관계의 문제점이 부분적으로나마 해결되기 전에는 피할 수 없는 혼란이다. 부시의 아버지(부시 전 대통령)가 말한 ‘새로운 세계질서’란 없었다. 갈수록 더 혼란스러운 세계질서가 있을 뿐이다”

한반도 평화에 큰 악영향 없어-분단의 특수상황에 처한 한국은 미국의 정치적 결정에 강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번 사태가 한반도 평화과정에 악영향을 미치지는 않겠는가.

“미국은 당분간 한반도 상황에 관여할 여유가 없을 것이다. 북한은 이번 사태로 미국의 국익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부차적인 존재가 됐다. 물론 미국은 기존 영향력이 위협받는다고 판단하는 순간 곧바로 돌아올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때까지 남북한 화해는 각각 남북한 국내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안터뷰/김진호 국제부 차장〉



입력 : 2001-09-23 19:3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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