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이 2~3년 끌고 갔던 <경향과의 만남>인터뷰 첫회분이다. 백선생의 일정이 너무 빡빡해서 용산역에서 광주까지 KTX열차를 함께 타고 가면서 인터뷰를 했다. 출발전 용산역에서 찍은 사진 뒤편으로 보이는 철로가 남과 북처럼 평행선을 긋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광주역에 내려 허겁지겁 마감시간을 마췄던 기억이 새롭다.
[경향과의 만남] 백낙청 “통일 노력없는 평화 주장은 공허”
기사입력 2006-06-21 16:48| 최종수정 2006-06-21 16:48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12일 오전 서둘러 서울 용산역에서 KTX 열차에 올랐다. 광주에서 6·15 남북공동선언 6주년 기념 민족통일대축전 행사가 열리기 때문이다. 요즘 그는 6·15 민족통일대축전 남측위원회 상임대표로서 남북화해를 위한 사업에 적극 나서고 있다. 통일담론을 주도해온 그로서는 당연한 과업으로 보인다. 그에게는 남과 북, 해외동포들이 만나는 이 행사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그를 만나기 위해 기자는 KTX 열차에 동승해 통일, 한반도 평화 문제뿐 아니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 현안에 대해 물었다.
대화가 무르익어갈 즈음 열차는 유월의 햇살 아래 녹색이 만개한 김제평야를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드디어 광주역. 백 교수는 곧장 망월동으로 향했다. 전남도청이 떠나버린 광주 금남로는 민족통일대축전 맞이 현수막이 뒤덮고 있었다.
-2000년 6·15공동선언 이후 남북간 공동행사를 여러번 치르셨지만 북행 비행기 대신에 남행 열차는 처음 타시는 것 같습니다.
“광주에서 행사를 하자는 데 남측 내부에서 쉽게 공감대가 형성됐습니다. 아무래도 광주가 민주화운동이나 통일운동에서 특별한 곳이어서 그런 곳에서 민족공동행사가 열린다는 데 큰 의미가 있고요.”
-방북을 앞둔 김대중 전 대통령께 개막식 특별연설을 부탁하셨던데요.
“6·15행사가 마침 광주에서 열리고, 또 광주에서 노벨평화상 수상자회의가 열리기 때문에 김전대통령께서 어차피 광주에 오시거든요. 그분 건강상으로는 하루 앞당겨 오시는 게 상당히 부담이 되는 게 사실입니다. 그래도 개막식에 나와서 대중앞에서 한 말씀 하시는 게 광주시민을 위해서도, 행사에 참석하는 전세계 동포를 위해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 부탁드렸습니다. 방북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협상결과를 기대하기보다 남쪽의 누군가가 북의 최고지도자와 격의없이 대화하는 것이라면 김전대통령이 적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대등한 위치에서 상호 신뢰가 이미 구축된 상태에서 대화를 한다면 다른 누가 가는 것보다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4년 전 월드컵에 가려서 효순·미선양의 안타까운 죽음이 뒤늦게 여론의 관심을 받았는데 올해도 월드컵 열기에 6·15 광주행사의 의미가 빛바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월드컵 축구 중계방송을 보시는 편입니까.
“더러 방송을 봅니다. 뭐 날밤 새워서 볼 정도는 아니고요. 월드컵과 겹쳐 아무래도 행사가 국민들의 관심을 끄는 데는 불리한 게 틀림없습니다. 우리 언론에서 월드컵 부각시키는 것을 보면, 나도 물론 대한민국팀의 승리를 기원하지만 우리 언론이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번에 오는 안경호 6·15 북측 위원장은 지난 10일 조국평화통일위 서기국장 자격으로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6·15가 날아가고, 평양~서울로 가는 길과 금강산 관광길이 막힐 것이며, 개성공업지구 건설도 정면 중단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내정간섭은 물론이고 ‘서울 불바다’ 발언을 연상시키는 대목도 있었습니다.
“첫째는 상호체제 존중의 원칙에 어긋납니다. 한나라당도 남측 체제의 일부이고 한나라당 의원 가운데 남측 위원회에서 활약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런 점에서 맞지 않고. 또 현실적으로 그런 건 역효과밖에 날 게 없잖아요. 이번에 (그런 발언이)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면, 한나라당에 유리하면 유리했지 정부·여당에 유리할 게 하나도 없잖아요. 남쪽 실정에 대해서 북측의 일꾼들이 이해를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한나라당이 싹쓸이 승리를 거둔 5·31 지방선거를 계기로 한국사회가 보수화되는 뚜렷한 징표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나오고 있습니다. 통일운동 차원에서 이번 선거가 중장기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하십니까.
“한나라당이 압승을 하기는 했지만 북측에서 걱정한 것처럼 쟁점이 6·15정신은 아니었습니다. 한나라당이 내세우는 무능하고 오만한 정권에 대한 심판이었는데 실제로 얼마나 무능하고 얼마나 오만하냐를 떠나서 국민들이 큰 틀에서 맞다고 판단을 내린 거고요. 통일운동을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도 꼭 남의 일로만 생각할 건 아닙니다. 우리가 그동안 해온 통일운동이나 통일사업이 과연 얼마나 민심을 의식하고 존중하면서 해왔는가, 이런 걸 한번 반성할 때라고 봅니다.”
-백대표께선 또 진보진영 내 ‘반미 자주통일 대 남한내 노동해방’ ‘진보세력 대 개혁세력’ 등의 이분법을 지적하시면서 진보개혁세력의 여러 갈래가 스스로를 쇄신하면서 새롭게 결합하거나 연대하는 곱셈의 이치를 찾아보자고 제안하셨는데요.
“흔히 이 정권이 뺄셈의 정치를 해왔다는 말들을 하는데, 이번 선거결과는 뺄셈 정도가 아니라 나눗셈까지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열린우리당, 민노당, 민주당 표를 합쳐도 한나라당 표를 못따르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이 시점에서 단순히 덧셈해서는 소위 개혁세력에게 해법이 없다, 새로운 곱셈의 정치를 해서 늘리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이런 뜻입니다. 소위 자주파와 평등파, 이런 경우에 덧셈해봐도 사람들이 얼마나 돼요. 덧셈하자고 해도 말만 그렇지 실제 융합이 안됩니다. 나는 그런 급진적인 진보세력과 온건한 개혁세력이 다 합칠 수 있는 새로운 원리를 찾아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걸 ‘변혁적 중도주의’라는 표현을 썼잖아요. 좀더 중도적이고 실용적인 노선을 택하는데 그 목표를 분단체제 극복에 두는 거고, 우리 시대에는 어쨌든 한반도에서 분단체제 극복이 최대의 변혁과제라는 뜻에서 변혁적 중도주의입니다. 그런 인식을 공유하면서 합쳐야 한다고 본 것이지요.”
-최근 최장집 교수의 선(先) 평화론을 실명 비판하신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겠습니까. 최장집 교수의 새책 ‘민주주의의 민주화’에서 편집자는 백대표의 비판에 대해 ‘평화를 곧 남북한의 통일로 환원하는 접근에 비판적이다. 한반도 평화의 핵심은 남북의 합침이 아니라 공존하는 데 있다’면서 최교수의 강한 현실주의적 관점을 대변했는데요.
“나는 뭐 그런 논리가 최교수에게서 나오든, 편집자에게서 나오든 그냥 나와 의견이 다를 때는 내 의견을 말하는 거죠. 최교수가 나에게 답변을 해달라는 그런 게 아니죠. 한마디 덧붙이자면 나는 책이 나오자마자 서명해서 최교수한테 보냈고, 최교수는 잘 받았다고 정중하게 편지 보내왔어요. 평화를 통일로 환원하는 접근에는 나도 비판적이에요. 그런데 실제로 한반도에서 평화를 구축하려면 통일문제로 환원시켜도 안되고, 그렇다고 통일문제를 배제해도 안된다는 게 내 주장이거든요. 사안이 복잡한데 왜 ‘평화냐, 통일이냐’ 양분법으로 가느냐 그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에요. 남측이 제안한 연합제안과 북측의 연방제안의 단계를 낮춰서, 낮은 단계의 연방제에는 비슷한 점이 많으니까 대충 그 방향으로 가자. 그 뒤에 뭘할 거냐를 다투지 말고, 또 이런 단계를 생략하고 통일로 가자는 말도 하지 말자. 그렇게 합의한 게 아닙니까. 그런 원칙을 이행하면서 평화를 구축해야 구체적인 성과를 보는 거지, 평화가 중요하니까 통일 너무 부르짖어서 평화를 위협하지 말자고 하는 건 그냥 공자 말씀이에요. 그걸 누가 틀렸다고 합니까. 틀리진 않았지만 옳은 말씀 하는 걸로 끝나는 거죠.”
-비판의 강도가 강했다는 지적도 일부 있었는데요.
“모르겠어요. 최장집 교수도 아주 장기적으로 아주 먼 장래에 어떤 통일을 구상하고 있는지 그런 거는 뭐 분명하게 드러낸 바가 없으니까 잘 모르겠는데…. 지금 단계에선 급격한 통일론이든, 단계적 통일론이든 통일론하는 건 평화에 위협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 그 문제에 대해서 최교수가, 내가 책에 인용하고 있지만 상당히 단정적인 발언을 많이 했습니다. 내 비판이 과하지 않냐고 하는데 내가 인용한 대목들을 보면 최교수도 상당히 과한 얘기를 했다는 게 분명할 거예요.”
-최근 사회적 발언 빈도가 부쩍 잦아지셨는데…. 올해 초 창비 40돌을 맞아 ‘운동성 회복’과 학계의 토론 활성화를 위한 실명비판을 강조하셨던 맥락에서 읽힙니다. 앞으로도 실명비판을 계속 하실 생각이신지요.
“현 시점에서 뭐 다음 번에 누굴 비판하겠다는 건 없고요. (웃음) 최장집 교수가 워낙 유명인사이다 보니까 내가 최교수를 비판했다고 언론에 각광을 받아서 그렇지 나는 평생 실명비판을 하면서 살아온 사람입니다. 또 무수히 후배들에게 실명비판을 당한 사람이기도 하고요. 아쉬운 것은 사회과학도들이 자기들끼리도 정작 중요한 논쟁은 좀 덜하는 거 같고요. 또 나에 대해서는 대접을 해주는 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어떻게 보면 사회과학도 완장을 안 찬 사람이 지껄이니까 취급을 안하는 거 같기고 하고요. 그래서 앞으로도 계기가 되면 논쟁도 하고, 실명비판도 할 생각입니다. 물론 체력에 한계도 있고, 또 모든, 난 뭐 여러사람에게 비판을 받아온 사람인데…. 일일이 다 답할 수는 없잖아요. 내 나름대로 취사선택을 하긴 해야죠.”
-아무래도 통일운동의 현실에 몸을 담고 계시니까 전통적인 ‘정권과의 거리두기’ 입장이 바뀐 게 아닌가 하는 시각도 있는데요.
“글쎄요. 첫째는 남측위원회 대표 자리를 맡고 있다보면 현실적으로 여러가지 말을 아끼게 되는 점이 있습니다. 남측 정부에 대해서도, 북측 정부에 대해서도 그렇고요. 그러나 정부와 거리를 두고 내가 독립적인 지식인으로서 활동한다는 원칙에는 전혀 변함이 없다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