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정부 간에 어떠한 갈등이 있더라도 양국 시민들 간에 감정을 상하면 안됩니다. 한국 시민들이 ‘반일(No Japan)’ 운동을 벌이는 지금이 최악의 상황입니다. 일본 시민들에게 한국 시민들은 적이 아닙니다!”
그 어느 해보다 한·일관계에 먹구름이 짙게 깔린 채 맞은 광복절이다. 한·일 간 경제전쟁 탓에 1965년 수교 이후 갈등이 최고조로 달했다. 고교 1학년 때 일제 식민지배의 실상을 알고 난 뒤 평생 일본 정부와 국민이 과거사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해온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81)는 특히 양국 시민들에게까지 감정의 앙금이 확산되는 현 상황에 깊은 우려를 토로했다.
올해 제23회 만해평화대상 수상차 방한한 와다 교수는 지난 13일 경향신문과 만난 자리에서 “아베 신조 내각의 경제보복 조치에도 불구하고 양국 시민사회가 연대하는 것만이 양국 관계 개선은 물론 장기적인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라고 역설했다. 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 및 한반도 비핵화, 북·일 국교정상화를 토대로 동북아시아에 새로운 평화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외쳐온 원로 지식인의 충고를 들어본다. 인터뷰는 한길사가 서울 중구에서 운영하고 있는 인문예술공간 ‘순화동천(巡和洞天)’에서 진행됐다.
와다 교수는 올해 3·1절 100주년을 맞아 지난 2월 3·1 독립운동 정신을 이어받아 양국이 화해하고 동북아시아 평화를 위해 협력할 것을 권고하는 성명 발표를 주도하는 등 과거사 문제 해결에 앞장서왔다. 2015년에는 ‘아베 총리의 위안부 문제 해결과 과거사 왜곡 비판 세계 지식인 공동성명’을, 2010년에는 ‘한일합방 조약 원천 무효 한·일 지식인 선언’을 주도하는 등 일본 내에서 양심적인 지식인으로 꼽힌다.
- 먼저 올해 만해평화대상을 수상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소감을 말씀해주신다면….
“1970년대에 한국 민주화운동에 관심을 갖고 ‘창작과 비평’을 읽던 중 만해 선생의 문학과 생애를 다룬 논문을 접했습니다. 그때부터 한국 지식인들이 얼마나 한용운 선생을 존경하는지 알게 됐습니다. 선생은 시인이자 승려인 동시에 3·1운동의 지도자였습니다. 3·1운동 100주년에 그분의 이름을 딴 상을 받게 돼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독립선언서에 실린 만해의 공약 3장은 3·1운동에 비폭력 혁명이라는 성격을 부여한 것으로 의미 깊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일제의 한국 지배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계기가 있었는지요.
“1953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중학 마지막 해, 인생의 터닝포인트인 만큼 무언가 특별한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문예비평가이자 루쉰의 번역가였던 다케우치 요시미의 <현대중국론>을 읽었습니다. 작은 문고판 책이었죠. 루쉰은 일본의 중국 침략과 일본의 책임을 논했습니다. 일본인은 중국 공산주의자든, 민족주의자든 중국인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 반성해야 한다는 배움을 얻었습니다. 고교에 진학해서는 다케우치 요시미가 추천한 다이시모다 쇼의 <역사와 민족의 발견>을 잡았습니다. 내용 중 3·1운동을 다룬 글, ‘견빙(堅氷·견고한 얼음)’을 읽고 한국 역사에 대해 처음 알게 됐습니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매우 부당했으며 조선 민족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기본적으로 그 논문이 이후 저를 지배했다고 해도 무방할 겁니다. 그해 10월 한·일 수교 협상 과정에서 구보다 간이치로 일본 측 협상대표의 발언이 나왔습니다. 구보다는 ‘일본의 식민지배가 한국인에게 좋은 것이었다’고 말했습니다. 한국 측 협상대표는 ‘식민지배의 과거에 사죄해야 한다. 사죄하지 않는다면 대화를 계속할 수 없다’면서 협상을 중단했습니다. 당시 일본 정부와 신문은 일제히 한국 입장이 잘못된 것이라고 비난했죠. 저는 ‘구보다는 옳지 않다. 한국 대표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날 ‘일·한 (협상) 결렬에 대해 생각한다’는 글을 일기에 썼습니다. 한국 대표의 말은 단순히 한 한국인의 목소리가 아니라 한국민 전체의 목소리라고 적었습니다. 저는 이게 옳으니 이 편에 서서 일생 동안 목소리를 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후 66년 동안 일본 정부와 국민은 식민지배의 과거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해왔습니다.”
- 아베 신조 일본 내각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우대국)에서 제외하면서 양국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습니다. 현 상황을 어떻게 보고 계신지요.
“아베 총리의 결정은 그가 한국에 대해 가져온 강경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지난 1월 국회 시정방침 연설에서 중국과 북한, 러시아와 관계 개선을 강조하면서 한국에 대해선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한국을 상대하지 않는다’는 선언이었죠. 돌이켜보면 아베 총리가 재집권하고 처음 직면한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법을 도출토록 압박을 받고, 이에 굴복해 조치를 취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베 총리에겐 굉장히 큰 불만이었죠. 그 후 북한과 미국의 대립이 깊어졌습니다. 아베 총리는 철저한 대북 압력을 주장했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전쟁은 절대로 안된다며 중재에 나서 북·미 정상회담을 성사시켰습니다. 아베 총리로서는 미국과 북한, 한국이 탄 버스를 놓친 셈으로 커다란 심리적 부담을 느끼게 된 사태였습니다. 그런 것이 중첩돼 이번 결정을 내린 것 같습니다.”
- 일본의 여론은 어떻습니까.
“중요한 점은 일본 국민 다수가 아베 총리의 정책을 지지한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문 대통령의 정책과 일본에 대한 태도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2015년 한·일 위안부 문제 합의는 한국 국민들에게 만족스럽지 않은 합의입니다. 그건 좋습니다. 그다음이 문제입니다. 일본 사람들에게 아무런 메시지를 주지 않았습니다. 화해·치유재단을 폐쇄하면서 최소한의 설명도 없었습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 36명에게 1000만엔씩 지급한 것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입장을 내놨어야 합니다. 한국 대법원이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내린 뒤) 아베 내각이 내놓은 징용공 문제 관련 제안들에 대해서도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이에 대해 한국 외교부는 일본 측과 상시적으로 소통하며 협의를 진행해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 국민으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문재인 정부의 실수였던 것이죠. 이런 마음이 있으니까 일본 국민이 아베 총리의 정책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매우 나쁜 상황입니다.”
- 한국 정부가 일본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것을 우려하셨는데 그렇게 됐습니다.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도 재검토하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가 아베 내각과 동일한 조치로 대응하는 것은 어느 정도 부득이한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상황을 더더욱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몰고가는 느낌이 들어, 이를 막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는 (그렇게 함으로써) 일본 정부에 ‘당신들이 조치를 취소하면 우리도 취소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정부 간 대화는 어차피 정치적 협상이니까요. GSOMIA를 취소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 아닙니다. 전략적 이해를 공유하는 미·일, 한·미 동맹을 저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일본 보이콧’보다는 낫습니다. 최악의 상황은 한국 시민들이 일본을 보이콧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No)아베’ ‘반(No)일본’,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양국 시민 간) 감정을 해치는 일입니다.”
- 아베 총리는 ‘손자에게 사죄의 숙명을 지우게 할 수는 없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과연 한국이 아베 정권과 역사 문제 해결을 도모할 수 있을까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아베 총리와 역사 문제를 논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인이 조선 식민지배를 반성하는, 그런 완전한 역사적 인식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지만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일본인과 한국인은 어쨌든 함께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대전제입니다.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의 관계를 강조하는 겁니다. 그러한 마음이 일본 국민 안에서 나와준다면 이를 통해 압력을 가해 아베 총리로 하여금 국민의 목소리에 따른다는 방식으로 한국과 협의를 시작하도록 하는 게 중요합니다. 징용공 문제도 시간이 걸리겠지만, 계속 대화해야 합니다. 역사 문제는 또 나오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베 총리 이후에나 역사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본 국민들에게 ‘한국은 적인가’라고 물으면 물론 ‘적이 아니다’라고 답합니다. 아베 총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지만, 그 역시 한국을 공공연히 적이라고는 말하지 못합니다. ‘한국을 적이라고 하면 안된다’는 국민의 목소리가 높아지면 아베 총리도 후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아베 신조 내각은 한국 측과의 고위급 협상을 거부하는 한편으로 북한과의 대화를 절실하게 요청하는 방식으로 남과 북을 분리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이제 아베 총리의 입장을 잘 알고 있기에 대화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북한은 일본의 배상금이 필요합니다. 대일 관계정상화는 북한의 양대 목표 중 하나입니다. 첫번째 목표는 핵무장이었죠. 핵무기를 개발, 보유한 뒤 일본과 수교하는 것이 북한이 간절하게 추구해온 목표입니다. 아베 총리에겐 (한반도 평화보다) 납치자 문제 해결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북한이 모든 납치 피해자를 생환토록 해야 한다는 원칙이고요. 이는 불가능한 일이기에 역시 ‘아베 이후’에나 해결이 가능할 것입니다. 지금은 한·일관계 개선이 더 중요합니다. 어려운 문제가 됐지만, 한·일 양국 국민들이 관계 유지를 위해 뭉친다면 해결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북한과는 그러한 (양국 시민사회 간) 토대가 없습니다.”
- 한·일관계는 1965년 청구권협정이 불화의 소지를 담고 있기에 어려움을 겪어왔습니다. 북한은 과거 한국의 실패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박정희 정부의 실수만은 아닙니다. 당시 일본 내각은 배상금 외에 아무것도 주지 않았습니다. 배상금을 받아 경제개발에 투자하는 게 그로선 최선의 선택이었죠. 한일협정은 50년 넘게 지속되면서 양국 관계의 토대가 됐습니다. 토대를 파괴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그 토대 위에 무언가 새로운 것을 구축해야 합니다. 2002년 북-일 평양선언 역시 한일협정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 위에 ‘무라야마 담화’라는 새로운 요소를 포함시켰습니다. 북한은 이를 김정일 위원장의 업적으로 평가합니다. 1990년대 말 일본에 밀사를 보내 ‘일본이 과거 제의했던 경협자금을 받을 준비가 됐다’고 밝힌 것의 연장선상에서 평양선언이 이뤄졌습니다. 위안부와 강제징용 문제는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이후 전개된 상황이 있는 만큼 무언가 관련 조항을 더하려고 할 것 같습니다(무라야마 담화는 종전 50주년이던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공표한 것으로 일제 식민지배와 침략에 대해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명했다). 한국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 북한이 평양선언을 기본으로 일본과 관계정상화를 하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그런 한국 내에서 1965년 협정 자체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 한일협정부터 양국 관계에는 미국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한·일이 미국 입김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양국 관계와 지역 안보구조를 만들 수 있을까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북·미 협상에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대북 체제 보장을 매듭지은 뒤 평화체제를 논의할 때 주한미군과 주일미군 문제를 반드시 거론해야 합니다. 북한이 평화적으로 비핵화를 한 뒤 남북한과 일본이 어떻게 안보체제를 구축할 것인지 머리를 맞대야 합니다. 저는 남북한과 일본이 일본 평화헌법 제9조(평화국가)를 공동채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 없이 북한은 비핵화를 하지 않을 것이며, 남북한이 연합할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북한과 일본이 미국과 중국, 러시아에 핵무기 사용 금지를 촉구하고, 새로운 동북아 안보체제 논의를 요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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