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안보 환경을 진단한다 - 下
GSOMIA는 한·미·일 모두 패자…미, 공정한 리더십을
중·러 합훈 늘어날 것…한·미동맹 재확인 통해 대응해야
북·미 협상 지지부진 뒤엔 모종의 ‘전술적 합의’ 있어 보여
“국제정치학을 공부한 미국 시민으로 단언컨대, 미·일동맹과 한·미동맹 간에 우선순위나 위계질서는 없다.” 존 아이켄베리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64)는 한국 정부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종료 결정 이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강한 반응에도 군사동맹국으로서 한국에 대한 인식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자유주의 국제정치학을 대표하는 아이켄베리 교수는 또 “미국은 한·일이 타협할 수 있도록 제3자로서 공정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면서 “현 사태는 한·미·일 모두 패자가 되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지난달 말 국방대 안보문제연구소가 주최한 제1회 세계안보학대회 참석차 방한한 아이켄베리는 스티븐 월트 하버드대 교수(8월29일자 인터뷰)와 마찬가지로 아시아에서 미국의 전통적인 외교력 복원을 당부했다. 하지만 결이 달랐다.
현실주의 정치학자 월트는 중국의 미사일 개발 등의 악재로 동아시아 안보환경이 달라졌지만 “미국의 ‘군사적 균형’이 강고하기에 생각만큼 큰 변화는 아니다”라며 과장할 필요가 없음을 강조했다. 하지만 아이켄베리는 “2002년 미국의 탄도탄요격미사일제한(ABM) 조약 탈퇴부터 시작된 국제 핵무기 통제시스템의 붕괴”로 평가했다.
“미국과 아시아 동맹국 간의 안보시스템을 뒤흔들려는 중국과 러시아의 움직임이 더욱 심해질 것”이라면서 현 상황을 ‘심각한 위기’로 진단했다. 이들은 그러나 한국이 동아시아 안보환경의 변화에 대응하는 최선의 전략은 한·미동맹을 강화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이 ‘바라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관점’이라면, 자유주의는 ‘개방성과 다자주의, 민주주의 국가들의 연대 및 협력적 안보 등을 공유하는 신념체계’다. 하지만 모두 미국 중심의 세계관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음은 아이켄베리와의 일문일답.
- 한국의 GSOMIA 종료 이후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에 ‘강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반면에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우대국)에서 제외한 일본의 조치에 대해서는 사실상 침묵하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한 한 한·미·일 3자 모두가 패자다. 한·일 양국이 모두 서로 보복하려는 동기가 있는 만큼 미국은 한·일 모두와 대화를 해야 한다. 어느 한 나라를 빼놓을 수 없다는 말이다.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은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 간의 연대에 초점을 둬야 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트럼프 행정부는 동맹국들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 한·일에 대한 미국의 차별적인 대응 탓에 ‘한·미동맹이 미·일동맹의 하부구조가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온다.
“두 개의 동맹 간에 순위나 위계는 없다. 만일 미국이 어느 한 나라와의 동맹을 중시한다면 그 결과는 파괴적일 수밖에 없다. 미국이 내보낸 메시지들이 한·일 간에 다른 우선순위를 부여한 것이라는 해석에 동의할 수 없다.”
- 트럼프 행정부는 필요 이상으로 방위비 분담금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동맹이 지속 가능한가.
“방위비 분담금 협상은 양국 정부, 양국 국방부 간에 조용하게 대화할 문제다. 대화는 선의에 토대를 두고 세부사항을 검토하는 전문가적 관점에서 해야 한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도발적인 트위팅을 함으로써 무책임하게 행동하고 있다. 동맹관계는 물론 미국의 세계 리더십에 해를 끼치는 행위다. 동맹은 한국은 물론 미국에도 유익하다. 이게 분명한 원칙이다.”
- 미·중 무역전쟁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미국 내에서는 중국의 지식재산권 침해 및 시장 접근 제한 국영기업 문제 등에 개입해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찬반 입장과 무관한 관심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관세와 무역수지에만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미·중이 다뤄야 할 것은 ‘시장 자유화’의 문제다. 중국은 미국과 다른 시스템, 다른 구조이기에 내년에 민주당 대통령이 당선되어도 해결이 녹록지 않을 것이다.”
- 미국의 중거리핵전력(INF) 조약 파기가 동아시아 안보환경에 주는 함의는 무엇인가.
“INF 파기는 예상됐던 문제다. 미국과 러시아 간 전반적인 군축 및 상호 자제 시스템이 붕괴되고 있는 현상의 일단이다. 2002년 미국의 탄도탄요격미사일제한(ABM) 조약 탈퇴로 시작된 일이기도 하다. 러시아 역시 조약을 위반함으로써 빌미를 제공했고, 중국의 미사일 개발이 동아시아 안보를 불안정하게 했지만 미국은 INF를 파기하는 대신, 군축외교를 시작했어야 한다. 냉전 및 탈냉전 이후 핵무기 통제의 틀이 무너지고 있다. 각국은 서로 상대의 의도를 의심해 무기를 늘려가는 ‘안보 딜레마’에 빠져 있다. 매우 위험한 시점이다. 서로 의심하는 대신 자제하는 제스처를 보임으로써 외교적 기회를 탐색해야 한다. 그게 황금률이다.”
- 트럼프 행정부의 군축정책은 과연 무엇인가.
“그런 정책이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군축은 물론 모든 양자 간, 다자간 합의에 대해 불신을 갖고 있다. 존 볼턴(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불신이다. 미·러가 보유한 1500여기의 핵탄두는 큰 위협이며, 계속 관리돼야 한다. 하지만 미·러 안에서 바른 소리가 안 나오고 있다. 중국은 (자신들이 빠진) 기존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 중국을 포함한 INF 협상 가능성을 어떻게 보나.
“미·중 간이건, 미·중·러 간이건 중국이 포함된 INF 협상은 우리 시대에 가장 힘든 협상이 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트럼프 행정부에서는 없을 것이다. 냉전 시절 미·러는 군사력이 비슷한 대칭관계였다. ‘내가 X를 할 테니 너는 Y를 하라’는 방식의 협상이 덜 어려웠다. 반면에 중국은 신흥국가다. 미국과 군사력이 대등하지 않기에 서로 주고받을 게 적다.”
- 중·러 합훈이 늘어나고 있다. 최근엔 러시아 군항기가 독도 상공을 정찰했다. 한국이 안보환경 변화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심각한 상황 전개이다. 갈수록 그러한 일은 더 자주 일어날 것이고 한국과 미국, 한·미동맹을 더욱 불안케 할 것이다. 쉬운 해법은 없다. 하지만 동맹관계를 재확인함으로써 중·러의 행보를 뒤로 물려야 한다는 신호를 보내야 한다. 동맹이 흔들린다면 한국이 자칫 동아시아에서 흔들리는 (군사적) 균형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
-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에 이어 미국 중거리 미사일의 한반도 배치 가능성이 제기된다. 사드는 그나마 방어용 무기이지만 미사일은 공격형 무기 아닌가.
“방어형 무기라지만 사드 역시 중국에는 위협이다. 자신들의 미사일 억지력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지역 안보를 더 불안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사드건, 중거리 미사일이건 위협의 원천이 제거되면 필요 없어진다. 군축협상이 긴요한 이유다.”
- ‘자유주의 국제주의자(liberal internationalist)’로서 지금까지 북·미 협상을 어떻게 평가하나.
“대북 제재는 (국제사회가) 북한의 핵·미사일 활동을 용납하지 않음을 알려준 중요한 신호였다. 하지만 제재는 외교를 통해 조정돼야 한다. 자유주의 국제주의자들은 합의를 중시한다. 핵무기 보유의 대가를 높게 지불토록 대북 압력을 늘릴수록 합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동시에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통해 북한 스스로 핵무기를 내려놓도록 노력해야 한다.”
- 북·미 협상이 가닥을 잡지 못하고 있는데.
“트럼프는 김정은을 오랜 친구로 대함으로써 그에게 지위와 선물을 제공했다. 하지만 돌려받은 건 없다. 뉴욕 부동산 업계에서나 통할 뿐, 지정학적인 문제에서는 먹히지 않는 방식이다. 트럼프와 김정은 간에 모종의 ‘전술적 합의’가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북한은 장기적인 게임을 하면서 제재를 견뎌내고, 핵무기 보유를 기정사실화하려 할 것이다. 단계적(step by step) 협상은 양면이 있다. 미국은 긍극적인 비핵화를 원하지만, 북한은 핵무기를 보유한 채 제재를 피해 나가려 할지도 모른다. 그보다 단계적으로 양보를 교환하는 방식(step for step)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제재를 일부 완화해주고, 영변 핵시설을 파괴하는 방식이 좋다고 본다. 완전한 비핵화는 아니지만 최소한 핵무기 파괴 과정의 출발점이 될 수 있지 않겠나. 그 후에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다.”
- 북한의 단거리 미사일 발사가 일상이 되고 있다. 북한은 미국이 올해 말까지 셈법을 바꾸지 않으면 ‘새로운 길’을 가겠다고 했다.
“새로운 길은커녕 핵·미사일 실험을 재개하는 낡은 길일 것이다. 북한의 단거리 미사일 발사를 트럼프가 용인하는 것은 어쩌면 현재 진행 중인 ‘드라마’의 일부분일지 모른다. 서로 자제하는 제스처를 보임으로써 양보를 교환하자는 신호일 수도 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12월 이후 북한의 도발에 대비하는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한·일은 물론 중·러도 끌어들여 5개국 간 느슨하나마 공감대를 도출함으로써 북핵 문제를 다자화해야 한다.”
- 버락 오바마를 비롯해 역대 민주당 대선후보들에게 외교안보 자문을 해왔다. 내년 대선에서 민주당이 이긴다면 동아시아 정책을 어떻게 펼칠 것으로 보나.
“오바마 행정부와 비슷할 것 같다. 중국을 직접 상대(engage)하는 동시에 서로 (군비경쟁을) 자제하는 재균형을 시도할 것이다. 북한에는 제재와 외교를 함께 구사할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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