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터키 지배 500년… 발칸 “은자의 나라”/민주화 5년째로 과도기적 혼란… 시민들 오페라감상 등 삶의 질은 높아
아시아 대륙을 건너온 유라시아 횡단열차의 유럽구간은 이스탄불 시르케지역이 출발역이다. 기자는 이스탄불 아시아지역까지 특집을 맡았던 조성환기자에 이어 과거 오리엔트 익스프레스의 종착역이던 이지역에서부터 취재를 시작했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로 더욱 유명해진 오리엔트 익스프레스는 파리와 이스탄불을 잇는 유럽 최초의 대륙횡단 특급열차로 1883년 첫 기적을 울렸다. 호화열차의 단골손님은 유럽 각국의 왕족과 부호들이었다.
○오리엔트 특급 77년에 중단
크리스티의 소설은 강대국들의 이해가 첨예하게 부딪쳤던 이스탄불의 시대상황을 배경으로 했다. 실제로 마타 하리, 킴 필비 등 희대의 스파이들도 이 열차의 단골이었다. 오리엔트 특급은 그러나 갈수록 승객이 줄어 77년 운행이 중단됐다.
당시 여행객들이 묵었다는 이스탄불 페라 팔라스 호텔은 관광 비수기에도 불구하고 빈 방이 없을 정도로 북적였다. 고풍스런 실내장식에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유명인사들이 묵었던 호텔로서의 「이름값」 때문이다. 가장 인기있는 방은 단연 크리스티가 묵었던 411호실. 기자가 하룻밤을 보낸 118호 방문에는 「전루마니아왕 카롤」이 묵고 갔다고 적혀 있었다.
오후 늦게 시르케지역을 찾은 기자는 역장으로부터 구내매점에서 50년째 일을 하고 있다는 네자리 사칵(72)이라는 노인을 소개받았다. 불가리아 태생으로 어릴때 피난왔다는 노인은 오리엔트 특급이 운행되던 이스탄불의 황금시절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노인은 구유고분쟁 전인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뮌헨에서 이스탄불을 잇는 단축구간이 운행됐다고 말한다. 역 구내매점에 정착하기 전 야채가게와 채석장, 푸줏간 등을 전전했다는 노인의 신산스런 인생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촉수 낮은 전등이 밝혀진 역 대합실에는 스무명 남짓한 승객들이 앉아 있었다. 배낭족으로 보이는 일본인 젊은 연인 한쌍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남루한 옷차림의 중·동구권 출신 보따리장수들이었다.
주홍색 스카프 아래 짙은 회색 눈이 맑아 보이는 여인에게 말을 건네니 루마니아에서 왔다며 『도베르만, 달마티안 등 애완용 강아지들을 팔고 가죽옷을 한 보따리 샀다』고 말했다.
니콜레타 아가피엘(44)이라는 이름의 이 여인은 한번 여행에 20∼30명의 동료들이 함께 온다고 전했다. 연간 1백50만명에 달하는 중·동구권과 독립국가연합(CIS) 소속 공화국 보따리장수들이 터키 관광수입의 3분의1을 점유한다는 게 일마즈 엘소스 역장(53)의 설명. 역을 통해 반출되는 하루 50t의 화물도 이들이 구입한 섬유와 가죽제품, 운동화 보따리가 주종이었다.
호사스런 오리엔트 특급이 달리던 철로에는 이제 허름한 열차들이 들어선다. 이중 소피아와 베오그라드를 거쳐 부다페스트까지 가는 열차를 발칸 익스프레스라고 부른다.
기자는 밤 9시25분발 소피아행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우리의 통일호 열차쯤 되는 수준의 객차들은 저마다 국적이 달랐다. 터키와 불가리아, 세르비아 등지에서 만들어진 객차들이 모자이크된 「다국적」 열차였다.
광막한 어둠 속을 달려 열차가 불가리아 소피아에 도착한 시간은 다음날 오전 10시30분.
철도여행시 입국절차는 열차 안에서 하는 것이 상례지만 국경역의 불가리아 관리들은 승객들에게 역사로 걸어와서 여권을 제시하도록 요구했다.
○객차마다 국적 달라
강파른 인상의 30대 관리는 말이 통하지 않는 기자의 여권은 곧 돌려주었지만 함께 갔던 슬로바키아 남자 2명에게는 공연히 쇳소리를 내며 트집을 잡았다. 국경역에서 2시간 정차. 이러한 사정으로 발칸에서의 열차시각은 고무줄처럼 늘어난다.
소피아 중앙역은 현대식 건물임에도 관리가 부실한 탓인지 황량해 보였다. 고장난 에스컬레이터가 방치돼 있고 성한 공중전화를 찾기가 힘들었다. 시내 곳곳에 들어선 아파트 등 현대식 건물들은 외양은 무시하고 크고 단단하게 짓는 것이 미덕이었던 사회주의 「량의 경제」의 소산인듯 무미건조한 분위기를 풍겼다.
소피아 시내가 어딘가 엉성하게 보이는 또 다른 이유는 여타 유럽의 고도들과 달리 고색창연한 문화유적이 적기 때문이다. 14세기 말부터 꼬박 500년 지속된 오스만 터키의 지배기간동안 불가리아의 고유문화는 철저히 파괴됐다. 불행했던 역사는 불가리아를 발칸의 은자의 나라로 남게 했다.
민주화 5년째인 불가리아 사회는 아직 안정을 되찾지 못하고 있는 인상이었다. 작년 총선에서는 급진경제개혁을 시도했던 민주연합(UDF)이 패하고 구 공산당 계열의 사회당이 복귀했다. 설상가상으로 92년 이웃 신유고연방에 내려진 유엔의 경제제재로 80억달러의 직·간접 손실을 입었다.
소피아대학 조교수 블라디미르 졸보프(37)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변화를 두려워하고 있다』면서 『투표는 자주 하지만 상황은 80년대 말보다 나아진 것이 없다』고 현 상황을 진단했다.
그는 『의사나 변호사, 교수 등 전문직업인들은 여전히 육체노동자보다 열악한 대우를 받고 있어 젊은층일수록 국외로 떠난다』고 말했다. 소피아대학 정교수의 한달 봉급은 미화 200달러(약 15만원)로 전차운전사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이 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하고 지난 9월 개설된 한국어과 교수로 재직중인 최권진 박사(32)는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초능력이나 무속신앙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오페라와 음악 등 수준급 문화를 향유하며 대부분 교외에 별장을 갖고 계절따라 수영이나 스키 등 각종 사회체육을 마음껏 즐기는 소피아 시민들의 삶의 질은 높아 보였다.
공해와 마피아, 뿌리깊은 관료주의 등 동구 공통의 문제들은 있지만 무상에 가까운 교육과 의료서비스, 풍부한 농축산물 등 지표로만 측정할 수 없는 삶의 내용들이 과도기를 사는 불가리아인들을 지탱해주는 듯했다.
○“발칸의 십자로” 야심
불가리아 정부는 보스니아 내전이 종결될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이를 경제회생의 계기로 삼고 구유고재건 사업과 각종 사회기반시설(인프라) 확충에 적극적으로 뛰어들 채비를 하고 있었다.
현재 정부가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은 파리에서 독일∼오스트리아∼구유고지역∼불가리아∼이스탄불로 이어지는 유럽의 전통적인 동서관통도로인 「E79도로」의 복구사업.
장기적으로는 흑해연안의 항구도시 부르가스에서 아드리아해로 향하는 동서교통망과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그리스 남부로 통하는 남북교통망을 구축해 「발칸의 십자로」가 되겠다는 것이 복안이다. 불가리아 주재 한국대사관의 송영완참사관은 『재원확보 문제로 교통망과 통신 등 인프라 확충이 단기간내 성과를 기대하기는 힘들겠지만 작년을 고비로 불가리아 경제가 전기를 맞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한다.
차창에 비친 불가리아의 산야는 소담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다. 소피아 남쪽에 위치한 릴라의 사원으로 가는 길에 지나친 시골마을 어귀의 야트막한 언덕에는 어김없이 묘지가 있었다. 기자가 꽃이 놓여있는 묘지의 풍경을 무심히 바라보자 최박사는 며칠전인 11월4일이 자수쉬니차라고 불리는, 망자를 위해 기도하는 날이었다고 설명했다. 빨래나 청소를 금하고 묘지에 찾아가 포도주를 뿌리며 망자의 넋을 위로한다는 이날은 꼭 우리의 한식을 연상케 했다.<소피아=김진호 특파원>
불가리아 소피아(유라시아 철도기행: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