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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읽기/글로발, 발로글

유라시아 철도기행/베오그라드

by gino's 2012. 2. 23.

게재정보
1995/12/08 (금)     45판 / 11면
분류
문화
제목
신유고 베오그라드(유라시아 철도기행:30)
본문

◎희망 앗아간 전쟁 상흔… “옛날이 좋았다”/연료부족 「냉동열차」 운행… 보스니아 내전·경제 제재 여파 추운 겨울


소피아를 떠난 발칸 익스프레스는 신유고연방 국경을 넘으면서 모두 3번 멈춰섰다.
그럴 때마다 소총을 멘 녹색제복의 군인과 경찰, 세관원들이 올라와 여권·비자를 중복 검사했다. 6인 1실의 객차안의 승객들은 대부분 세르비아인이었다. 보스니아 내전의 여파에다 번거로워진 입국절차로 베오그라드를 찾는 외국인들의 발길은 거의 끊어진 상태.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로 구성된 신유고 영토에서는 단 한 차례의 전투도 없었지만 외국인들은 베오그라드를 경유하기보다는 대부분 하루가 더 소요되는 이웃 루마니아로 우회한다.


철로변 곳곳에는 장작더미가 쌓여 있어 유엔 경제제재 이후 4번째로 다가오는 겨울맞이의 어려움을 짐작케 했다. 경제제재의 위력은 열차 안에서부터 실감되었다.
언제부턴가 온기가 사라지더니 베오그라드 남쪽 250㎞ 지점의 니스시에 도착할 즈음엔 완전히 「냉동열차」가 됐다. 있는 대로 옷을 찾아입었지만 냉기는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이 곳에서 다시 40분 정차. 이곳을 떠난지 1시간쯤 지난 뒤에야 객실에 스팀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앞자리에 앉은 드라슈코 밀로예비치(37·공무원)는 『경제제재를 엄수하는 불가리아 당국이 국경에 도달할 만큼의 연료만 주고 난방에 필요한 연료를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소피아에서 출발한 디젤 기관차를 니스에서 전동차로 바꾼 뒤에야 난방을 재개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빈부격차 갈수록 심화

객차 안이 따뜻해지고 니스에서 올라 탄 밀라뇨비치(25·니스대 3년)가 끼어들면서 이야기는 활기를 띠었다. 화제는 자연히 보스니아 내전과 경제제재로 흘렀고 기자는 열차가 베오그라드에 도착할 때까지 꼬박 5시간 동안 이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가볍게 흩날리던 눈발은 열차가 베오그라드에 도착한 저녁 무렵 어느새 솜뭉치로 변했다. 발칸 전체에서 올해 처음 내린다는 눈. 「하얀 도시」를 뜻하는 고대 라틴어 「상기두눔」에서 이름이 유래된 베오그라드가 「본색」을 되찾은 셈이었다.

두나브(다뉴브)강과 사바강이 에두르고 있는 베오그라드는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발칸 전체에서 가장 풍요를 구가하던 곳. 그러나 보스니아 내전 이후 「대세르비아주의와 인종청소의 본영」으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고 있다.

고층빌딩이 줄지어 들어 선 오피스타운 크네스 미하일로바를 비롯해 도심 곳곳은 주말인파와 자동차가 어울려 활기를 띠고 있었다. 게다가 연례 고전음악축제인 「베무스」가 열리고 있어 구 시가지 중심부의 스카달리아 거리는 성장하고 나선 시민들과 눈마중 나온 젊은이들로 북적였다.
예술과 낭만의 거리로 불리는 스카달리아에는 「3개의 모자(3 세시르)」 「두마리 사슴(드바 옐레나)」 「나의 모자(모야 세시르)」등 재미있는 이름의 카페들과 문인기념관 등이 골목길 양쪽에 도열해 있었다.

생필품난에 허덕일 것으로 생각했던 베오그라드 시민들은 적어도 겉에서 보기에는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슬라브어로 「녹색 왕관」을 뜻하는 젤레니 베나츠시장에는 각종 농·축산물이 가득했고 노천 벼룩시장 「부빌리야크」와 도심 상점에는 전자제품에서 고급의상에 이르기까지 각종 상품들이 진열돼 있었다.

넉넉한 농축산물과 자급률 20%의 석유 등 풍부한 지하자원을 갖고 있는 신유고에서 경제제재가 기본 생활을 위협하지는 않는듯한 인상이었다. 베오그라드는 그러나 속으로 앓고 있었다.
보스니아 내전은 세르비아 민족이 근·현대를 통틀어 5번째 벌인 국제전이다. 두차례의 발칸전쟁과 세계대전에서 세르비아는 늘 분쟁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발칸이 「화약고」라면 민족의식이 특히 강한 세르비아는 그 「뇌관」격이었다.

보스니아 내전과 뒤이은 경제제재가 신유고에 남긴 충격파는 엄청난 것이었다. 계획경제에 대한 맹신을 일찌감치 버리고 자주관리 사회주의라는 「제3의 길」을 선택, 50년대 이후 구축한 산업기반은 송두리째 파괴됐다. 공식적인 피해액만 1천5백억달러. 80년대 초 현대 포니와 함께 미국시장에서 수출경쟁을 벌였다는 자스타바사는 4개월째 임금을 지불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재는 베오그라드 시민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까지 거세해 버렸다. 고교 졸업 뒤 「아카데미아 드람스키」(영화아카데미)에 진학하고 싶다는 마테아 네다도비치(18·학생)는 『종전이 돼도 향후 20∼30년까지는 희망이 없다고들 한다』면서 『공부를 마치는대로 이민 갈 것』이라고 말했다. 전쟁 전 오퍼상을 했다는 스베클라나 하이넬(38·여)은 『제재의 가장 큰 피해는 중산층의 소멸』이라면서 『93년 한때 최고 10억%에 달했던 천문학적인 인플레로 신유고의 중산층은 모두 빈곤층으로 전락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 대신 전쟁터와 암시장에서 큰 돈을 번 마피아 등 신흥부유층이 생겨나 빈부격차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겉은 풍요로운 굴절의 삶
서구에서 발칸으로 향하는 길목인 보스니아에서 벌어진 전쟁은 세르비아 뿐 아니라 동유럽 전체의 발전까지 지체시켰다. 철도와 도로, 수로가 막힘에 따라 인적·물적 교류가 정체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보스니아 종전의 희망과 함께 신유고에도 변화의 미풍은 불고 있었다. 신유고의 철도와 도로, 다리 등 사회기반시설을 총괄하는 CIP사는 막혔던 길을 뚫고 노후한 인프라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진행하고 있었다.

블라도 오스토지치 CIP부회장은 『철도의 경우 신유고 북단의 수보티차와 남단의 디미트로프그라드를 잇는 종단철도를 여객·화물 공용의 고속철도화하는 방안이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면서 『독일과 프랑스 정부가 가장 활발하게 참여논의를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장기 마스터플랜에는 또한 보스니아 지역의 철로가 복구되는 대로 흑해연안의 오데사항까지 연결하는 동서 기간철도망도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길이 통한다고 전쟁의 상처가 당장 치유되기는 어려운 실정. 지난 4년간 서방언론의 일방적인 「세르비아 때리기」로 고립감마저 느끼고 있는 베오그라드 시민들의 마음에 훈풍이 불기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였다.

○종전희망과 변화의 미풍
베오그라드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던 모스크바 호텔 커피숍에서 노신사 2명과 마주쳤다. 베오그라드 대학 교수를 지내다가 정년퇴직했다는 70대 초반의 이들은 『두나브강을 메우던 유람선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면서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 슬프다』고 말했다.

이들이 말하는 「좋았던 옛날」은 민족과 종교를 따지지 않고 나름대로 풍족하게 살았던 구 유고연방 시절을 가리킨다. 호텔 앞 거리는 밤이 깊을수록 불빛이 줄어들었고 행인들의 발자국을 덮는 눈보라가 한층 매서웠다.<베오그라드=김진호 특파원>

신유고 베오그라드(유라시아 철도기행: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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