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한국인 손님은 처음이라며 키아단 촌장 “친척 같다” 반겨
“발리, 산티 산티 산티(발리, 평화 평화 평화).” 집집마다 또 마을마다 산자의 거주공간과 함께 조상들과 힌두교 제신이 머물 사원을 갖추고 있는 곳, 흔히 ‘신들의 섬’이라고 불리는 인도네시아 발리에도 ‘공정(착한)여행’의 씨앗은 튼실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서구에서 고안된 공정여행의 개념이 발리에 식재(植栽)된 것이라기보다는 발리 사람들의 성정에 이미 배어있었다는 것이다.
키아단 마을의 골목산책을 시작하는 곳. 오른쪽 가족 사원의 검은 지붕은 야자나무의 풀로만 만든다.
지난 5일 쿠타 해변에서 승합차로 1시간30분 정도 걸리는 키아단 마을. 발리 내 4개 마을이 자생적으로 공동체를 구성한 에코 투어리즘 네트워크(JED)에 속하는 공정여행 마을이다. 해발 1000m의 고지대에 위치한 덕분에 저지대에 비해 약 10도의 기온차로 선선한 날씨였다. 주민 800여명이 농경지에 커피와 쌀, 바나나, 호박, 대나무 등을 경작하면서 살아가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스타벅스와 맥도널드 햄버거, 현란한 조명의 카페와 레스토랑이 전무한 이곳이 국제적으로 정평이 난 공정여행의 무대가 된 건 2002년부터다.
처음엔 지역 시민단체 위수르 재단의 도움으로 전체 240㏊ 마을면적의 구획을 정하는 작업부터 시작됐다. 농경지와 국유림, 하천, 우물 등의 기본적인 구획정리에서부터 제비의 서식지를 비롯한 동식물 분포지역까지 꼼꼼하게 파악했다. 여행 프로그램을 개발한 건 그 다음이었다. 지자체마다 이벤트성 행사로 쉽게 큰돈을 벌어들이려는 일부 한국 농촌의 관광프로그램과는 출발부터 개념이 달랐다. 관광사업을 위해 마을을 개조한 것이 아니라 마을의 주산업인 농업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관광을 선택한 것이다. 마을 안내를 맡은 주민 와이안 위라다(40)는 공정여행에 관심을 두게 된 가장 큰 이유로 “땅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생활 터전이자 아이들에게 물려줄 농경지가 사라지는 데 대한 위기감이 컸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실제로 제주도의 3배 면적인 발리섬은 관광시설을 만들기 위해 매년 수백㏊의 농경지를 없애고 있다. 또 관광산업의 부산물로 생기는 플라스틱 폐기물이 농업용수와 토양을 오염시키고 있기도 하다. 마을 주민 와이안 수카다나(40)는 “발리는 여전히 관광을 필요로 하지만, 종전과 같은 관광문화로는 지속가능한 삶을 이어갈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마위라다와 수카다나는 관광 안내인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부업일 뿐이다. 본업은 여전히 농부다. 주민들은 숙박·조리·안내·공연팀으로 각각 역할을 나눠 농사일 틈틈이 공정여행객들을 맞는다. 인상적인 것은 영국의 대표적 공정여행 사이트인 ‘책임여행’(responsibletravel.com)이 홈스테이 상품으로 추천할 정도로 평가를 받았지만, 크고 작은 방 11개를 갖춘 민박가옥 2채와 식당 겸 공연장 건물 외에는 어떠한 시설도 없다는 점이다. 하루 최대 수용인원은 10~15명으로 잡았다. 위라다는 “그 이상의 사람들을 받으면 종래의 관광과 무엇이 다르겠느냐”고 반문했다. 본업과 부업이 공존할 수 있는 한도가 15명이라는 말이다. 큰돈은 아니더라도 9년째 ‘지속가능하게’ 여행객들을 맞은 덕에 공동 관개시설 및 가정용 우물을 확충할 수 있었다.
키아단 마을의 여행객용 공연장에서 주민들의 공연이 끝난 뒤 착한여행 참가자들이 악기를 연주해보고 있다. 린딕(대나무 실로폰) 소리가 청아하다.
마을 소개와 JED 민박 프로그램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마을 주민들이 평소 먹는 대로 마련했다는 점심을 들었다. 이어진 코스는 ‘논두렁 트레킹’이었다. 건축물의 30~40% 정도가 사원인 발리 특유의 골목길을 벗어나 가파른 구릉을 오르내리며 위라다와 수카다나는 길가의 20여종의 약용, 식용, 기호 식물들에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냈다. 특히 ‘BBC’라고 불리는 바나나·대나무·커피는 발리주민들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시도 곁에 두지 않고는 살 수 없을 정도로 필수적인 작물이다. 집과 사원의 건축자재는 물론 음식과 각종 생활도구로 쓰인다. 1년 3모작이 가능하다지만, 가파른 구릉에 좁게는 4~5평에서 넓게는 30~40평 정도의 좁은 다랑논에서 벼농사를 짓는 게 쉬워보이진 않았다. 꼬박 반나절이 소요되는 마을 산책 길에서 주민들이 물을 얼마나 귀중하게 다루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샘이 있는 곳에는 별도의 사원이 있었고, 폭이 20㎝도 안되는 논두렁길을 따라서 작은 물줄기가 끊이지 않았다. 분명 논에 들어가는 물이지만 하나같이 맑았다. 깨끗한 물과 지속가능한 개발에 대한 주민들의 관심이 자연스러운 것은 전통적으로 수전농을 짓기 위해 구성한 ‘수박’이라는 공동체가 있었서다. 우리의 품앗이나 두레와도 유사한 면이 있지만 보다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보였다. 마을마다 행정 촌장과 주민 직선으로 뽑은 수박 책임자, 종교행사 책임자가 별도로 있었다.
힌두교에서 원숭이는 사원을 수호하는 상서로운 동물이다. 울뚜왓뚜 절벽사원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원숭이의 뒷모습.
산책 길에 야생 사향고양이의 배설물을 발견한 건 행운이었다. 사향고양이가 겉살만을 먹고 배설한 커피 알갱이가 한 잔에 5만~6만원 하는 루왁커피다. 고양이의 소화기관을 거치면서 천연 발효된 루왁커피의 맛은 커피 애호가들이 동경하는 사치품이다. 꼬박 반나절이 걸리는 마을 산책을 마치자 적당히 흐르는 땀과 함께 낯설면서도 친숙한 느낌이 다가왔다. 저녁식사에 이어 마을 주민들이 하나둘 모여 토속악기를 연주하는 가운데 전통 춤 공연이 이어졌다. 발리의 전통선율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5음계(당·딩·둥·댕·동)였다. 착한여행 발리팀은 키아단 마을의 첫 한국인 방문자들이었다. 마데 저판 행정촌장(43)은 “보통 미국이나 호주, 프랑스, 독일 등 서양 여행객들만 맞아왔는데 한국인 손님이 찾아오니 반갑다”면서 “얼굴 생김새나 인상이 친척 같다”고 말했다.
발리의 아침은 어디에서나 ‘쓰거한’ 또는 ‘반둔’으로 불리는 공물을 바치는 것으로 시작된다. 여인네들은 아침 식전에 손바닥만한 야자잎에 꽃·쌀·향·물을 담아 집 앞에 놓는다. 신들의 섬이라지만, 쓰거한은 악마들을 달래기 위한 선물이라고 한다.
현지 여행사 직원 마데 쑤나마(35)는 “발리 사람들은 쓰거한을 놓지 않으면 아침밥을 먹지 못한다”고 귀띔했다. 이튿날은 마을의 공동 커피 건조장과 브라마·비슈누·시바 등 발리 힌두교의 주신들을 각각 모신 3개 사원을 둘러보는 것으로 키아단 마을의 1박2일 일정을 마쳤다. 힌두교식 아침공물 쓰거한.
일상에 매몰된 사람들을 여행으로 초대하는 것은 즐거움이다. 공정여행이라고 여행기간 내내 지구온난화에 대한 걱정과 책임, 공정의식만 느껴야 하는 건 아니다. 자칫 공정여행에 낯선 사람들이 오해하기 쉬운 대목이다. 발리 여행팀의 여행기간은 5박6일. 나머지 일정은 발리에서 반드시 봐야 할 명소를 찾는 것으로 구성됐다.
울뚜왓뚜 사원 마당에서 열린 께짝댄스. 라마왕이 원숭이 군대의 도움으로 악마에게 잡힌 아내 시바를 구해낸다는 줄거리다.
발리의 힌두교는 신들만의 영역이 아니었다. 힌두교의 제신과 반신, 농경사회의 정령들이 조상신과 함께 어우러져 현세를 사는 사람들의 기원의 대상이었다. 인도에서 엄격하게 금하는 쇠고기가 인기 있는 먹을거리는 아니되, 힌두교 성직자만 아니라면 식용을 꺼리지 않는다. 신과 조상이 섞이듯 소는 농사의 도우미이자 섭생의 재료로 쓰인다. 힌두교 신자들은 앞가슴에 합장한 손을 모은 뒤 위·수평·아래의 세 방향을 가리키며 기도를 한다. 위쪽과 수평방향은 각각 하늘의 신과 지상의 사람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아래방향은 자손대대로 살아갈 자연의 안녕을 구하는 것으로 바로 공정여행의 지향점과 같았다.
뭍사람들의 눈에는 섬이 외로워보이지만, 정작 섬은 그 자체로 완벽한 조화를 이룬 하나의 우주였다. 발리는 그곳에 무심하게 있건만, 섬을 찾은 뭍사람들이 되레 자기 땅 한가운데에서 각각 고립됐던 섬이었음을 깨닫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남이 보건 보지 않건 홀로 꽃처럼 피어난다고 했던가. 발리는 그런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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