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뒤 유라시아 지역과 협력 플랫폼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갖고 있었죠. 그러다가 에스디지(SDGs)가 내비게이션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흐릿했던 밑그림이 분명해졌습니다.”
퇴직 외교관들이 활동하는 무대는 대개 정해져 있다. 강단에서 경험을 공유하거나, 종종 국제관계 세미나에서 패널로 참가한다. 또는 특정 국가에 구축한 인맥과 전문지식을 활용해 기업 컨설팅을 하는 게 적지 않은 외교관들의 ‘시즌2’이다.
36년 외교관 생활의 태반을 유라시아에서 보낸 이양구 전 우크라이나 대사(61)는 다소 결이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어느 현직보다 분주한 ‘외교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그를 지난달 22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 접견실에서 만났다.
그와의 대화는 ‘기승전SDGs’로 귀결된다. 유엔이 2030년까지 추진하는 ‘지속가능한개발목표(SDGs)’를 제2 인생의 향도로 삼았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를 중심으로 미국, 영국, 이스라엘, 폴란드, 아일랜드의 대학, 기업, 연구기관, 지자체, 중앙 정부가 참여하는 바이오메디컬헬스케어 플랫폼 구축. 우크라이나 르비우 바이오 클러스터 건설 합의. 코로나19로 발이 묶였지만, 그가 퇴직 첫해인 작년 온·오프라인에서 발품을 판 결과물들이다.
작년 11월엔 국내 민간협의체 STS&P와 유엔의 조달청 격인 유엔사업서비스기구(UNOPS)의 연례 콘퍼런스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유엔 글로벌혁신센터(GIC)를 창원에 유치하는 데 역할을 했다. GIC는 유엔 목표에 걸맞는 스타트업이나 중소기업을 발굴해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원 이상의 비상장 스타트업)’으로 키우는 곳이다.
유엔의 목표는 극심한 가난과 굶주림 종식, 건강 및 웰빙, 기본교육 달성, 젠더 평등, 깨끗한 물 및 보건, 지불 가능한 청정에너지, 모성보건 등 17개다. 산업·기술혁신·인프라 건설을 추진하지만 존중받는 노동과 양극화 개선, 지속 가능한 도시, 책임 있는 소비·생산, 기후행동, 해양 생물 및 생태계 보존, 토양 환경, 평화·정의·강한 제도 등을 포함한다. 숫자로 설명하면 총 17조달러의 블루오션이다.
이 전 대사는 “SDGs는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미래의 일자리이자 먹거리”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왜 그럴까. SDGs의 마지막 목표인 ‘목표달성을 위한 파트너십’을 들여다보면 답이 나온다. 자칫 고립된 채 소멸될 수 있는 개개의 목표들을 엮어내는 ‘마술’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개발목표는 다시 하부 항목으로 분화한다. 그가 지난해 한국능률협회 컨설팅을 거쳐 자신만의 전략을 손에 쥔 까닭이다.
“수많은 개발 목표들을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여러 단계의 네트워킹을 거쳐 더 큰 가치사슬로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구상이 명확해졌다.” 생명체와의 차이는 자가증식을 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 연결을 해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는 바로 그 연결자 역할을 떠맡았다.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 등 익숙한 유라시아가 주 활동무대다. 그는 “일대일로 사업처럼 유라시아에선 강대국이 하면 지정학적 오해를 받기 쉽지만, 한국처럼 중견국이 주도하면 신뢰자산을 얻기가 쉽다”고 강조했다. “미·중 경쟁의 시대, 유라시아에 가치의 비단길을 여는 것이야말로 한국이 기여할 최적의 어젠다이자 임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 전 대사는 특히 한국의 보건·방역·폐기물 재처리 기술·스마트팜을 유망 분야로 꼽았다. 우크라이나의 바이오 클러스터는 방역물품 수출을 넘어 현지생산과 유럽 공동진출을 도모하고 있다.
그는 마지막으로 “SDGs는 젊은 기업가뿐 아니라 은퇴를 앞둔 5060에게도 기회의 창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스마트팜의 경우 직접 농사를 지을 수도 있겠지만, 조합을 구성해 일감과 문화, 가치를 연결하며 글로벌 공동체와 만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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