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반복된다. 주먹에 관한 한 자신 있는 거구의 헤비급 권투선수가 있다고 치자. 갈수록 주먹이 세지는 동급의 상대가 있지만,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왔다. 어느 순간, 상대의 주먹이 만만치 않음을 발견한다. 그렇다고 챔피언 자리를 내줄 수 없는 법. 어르고 달래보지만 당최 여의치 않으면, 모종의 결단을 해야 한다. 거인의 다음 행보는 무엇일까.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에서 미국의 선택은 ‘주먹’을 한개 더 늘리는 것이었다.
1957년 10월4일 카자흐스탄 바이코누르 발사기지1에서 소련이 스푸트니크 인공위성을 발사했다. 그때까지 록히드 U-2 정찰기를 소련 상공에 띄워 동태를 파악해왔던 미국은 충격에 빠진다. 소련의 인공위성이 미국을 속속들이 들여다본다는 상상에 일반 국민들에까지 공포가 확산됐다. 소련은 미국이 1954년 9월 세계에서 처음으로 취역시킨 핵추진 잠수함(핵잠)마저 4년 뒤 자체 개발에 성공했다. 미국과 영국이 냉전이 한창이던 1958년 상호방위조약을 맺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소련의 위협이었다. 조약의 핵심은 영국이 개발하려 했던 핵잠 기술을 미국이 공유한 것이었다. 향후 10년간 잠수함 연료용 농축우라늄을 영국에 제공키로도 약속했다. 미국이 ‘주먹’을 늘리려고 할 때 달려가는 나라는 주로 앵글로 색슨 국가들이었다.
미·영은 핵무기 개발에서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미·영 정상은 1943년 8월 ‘퀘벡합의’를 통해 핵무기를 개발하던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와 영국의 튜브 알로이 프로젝트를 통합했고, 이후 핵기술 협력 대상으로 캐나다를 포함시켰다. 지난달 15일 미국·영국·호주가 맺은 3개국 안보협력체(AUKUS·오커스)의 핵심 역시 핵잠 기술의 공유이다. 소련의 위협이 커지던 냉전 시기 다급해진 미국이 대서양을 건넜다면, 이번엔 태평양을 건너왔다. 중국의 ‘주먹’이 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꼭 세지 않아도 된다. 그럴지도 모른다는 ‘인식’만으로도 움직이는 게 안보전략이며, 강대국 정치다.
동아시아 분단국에서 추석 이후 종전선언을 하느니, 마느니 왈가왈부하는 사이 국제정세는 또 하나의 변곡점을 지났다. 농축우라늄을 원료로 사용하는 핵잠은 두 가지 측면에서 국가 간 힘의 균형을 일거에 흔들 수 있는 전략무기이다. 우선 연료의 종류에 따라 전략적 함의가 증폭된다. 고농축우라늄(HEU)은 핵실험이 필요 없이 곧바로 핵탄두로 만들 수 있다. 호주가 핵잠 기술과 함께 HEU를 제공받는다면, 아시아에서 중국과 인도, 북한에 이어 ‘사실상 핵보유국’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핵잠은 전략폭격기 및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함께 전략핵무기 삼총사의 하나인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의 투발수단이 될 수도 있다.
핵잠은 현재 미국과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등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과 인도만 보유하고 있다. 브라질은 저농축우라늄(LEW)을 연료로 하는 핵잠을 개발중이다.
지난달 15일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화상 공동회견에서 발표한 공동성명은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의 수호 의지가 강하게 반영돼 있다. 성명은 “(핵 관련) 안전조항과 투명성, 검증, 비확산과 핵안전, 핵물질 보안 및 기술의 정확성 등에 대해 높은 기준을 준수할 것”을 다짐했다. 농축우라늄과 핵잠 기술을 공유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많은 고려와 검토 과정을 거쳐야 한다. 성명이 향후 18개월 동안 호·영·미 3국이 공동연구를 진행한다고 명시한 이유다. 공동연구에는 미·영이 호주에 제공할 핵잠의 유형, 핵연료 종류 결정, 핵물질 취급 및 보관 문제, 잠수함의 수리·정비·정박시설 등에 관한 숱한 논의가 포함될 것으로 예상된다(이병철 경남대 교수). 모리슨 총리는 핵잠 기지로 애들레이드를 지목하면서 “호주가 획득하려는 것은 핵추진 잠수함이지 핵무기 장착 잠수함이 아니다”라고 명토 박았다. 존슨 총리와 바이든 대통령 역시 오커스가 비확산 체제에 역행하는 게 아님을 되풀이 강조했다.
강한 부정은 긍정이다. 3개국 정상이 “정말 아니다”라고 거듭 강조하는 것이야말로 “그렇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사실이 그렇고, 현실이 그렇다. 오커스로 호주가 농축 핵연료와 핵기술을 확보하게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바로 그 때문에 미국이 남중국해에 전개된 중국 해군을 견제하기 위한 ‘핵주먹’을 배치했다는 게 객관적 현실이다.
3개국 정상은 성명과 뒤이은 공동기자회견에서 ‘중국’을 단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성명과 발언에 동원된 언어는 우회적이되 또렷하게 중국의 위협을 특정하고 있다. 성명에서 ‘해양 민주주의(maritime democracies) 국가’로 지칭한 호·영·미 3국이 ‘차세대 파트너십’을 만들어야 하는 까닭은 ‘21세기의 도전’ 때문이라고 명시했다. ‘도전’ 또는 ‘위협’이라는 말로 중국을 대체했을 뿐이다.
바이든은 “오커스가 지역의 현재 전략적 환경과 그 변화에 모두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면서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FOIP)’을 강조했다. FOIP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이후 미국이 남중국해에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수없이 강조해온 전략적 목표이다. 오커스는 미국이 지역 안보 문제를 지역 국가에 맡기려는 ‘역외균형 전략’에도 들어맞는다. 미국·일본·호주·인도의 쿼드(QUAD)가 느슨한 대중국 포위체라면, 오커스는 호주를 내세워 중국의 해양 진출에 보다 직접적인 쐐기를 박으려는 포석이다. 당연히 가장 강하게 반응하는 국가는 중국이다.
중국은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심각하게 해치고 군비경쟁을 심화시키는 일이자, 비확산 노력을 해치는 일”이라며 반발했다. 자오리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지난달 16일 정례브리핑에서 “미국과 영국이 핵 수출을 지정학적 게임의 도구로 삼은 것은 이중잣대인 동시에 지극히 무책임한 처사”라고 말했다. 러시아 역시 “오커스는 국제 비확산 체제에 심대한 도전”이라며 우려를 표명했다. 세르게이 리야코프 러시아 외교부 차관은 “러시아는 호주가 18개월의 협의를 거쳐 수년 내 핵잠 5대 강국이 되는 것을 우려한다”고 말했다.
오커스 출범은 인도·태평양 지역에 군비경쟁 가속화라는 후폭풍을 예고한다. 단순히 전함 몇개를 추가 배치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군비경쟁의 근본적인 구도를 바꿔놓았다. 미국은 물론 일본에 비해서도 해군력이 떨어지는 중국은 몇년 전부터 남중국해 해상 진출을 확대하면서 원시적인 ‘전함 부딪치기’ 전술로 미 해군에 맞서왔다. 이제는 바닷속 호주의 핵잠까지 대처해야 한다. 주먹은 주먹을 부른다. 중국은 기존의 ‘반접근/지역거부(A2/AD)’ 전략을 수정, 해상 핵전력의 획기적인 강화에 나설 것임을 예고한다. 트럼프 행정부가 2019년 8월 미·러 중거리핵전력(INF) 조약을 파기한 데 이어 바이든 행정부가 오커스를 출범시킴에 따라 중국의 방위전략을 근본적으로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호주 국방부가 낡은 잠수함을 대체하려는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은 2007년이다. 2009년 호주 국방백서는 핵잠의 개발을 배제했었다. 2016년에는 프랑스 국영 방산업체 나발그룹과 500억달러 규모의 어택 클래스 잠수함 도입계약을 체결했고, 2019년 금액은 900억달러로 늘었다. 호주는 오커스 출범으로 나발그룹과의 계약을 파기하기까지 24억달러의 예산을 이미 투입했다. 그러나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정부가 오커스 출범을 두고 “등에 칼을 꽂는 행위”라고 통분한 것은 단순히 경제적 손해 때문이 아니다.
오커스 출범은 프랑스가 앵글로 색슨 국가들로부터 당한 두 번째 배신이다. 프랑스는 1958년 미·영 방위조약에 트라우마를 안고 있었다. 냉전 시기, 영국이 미국의 핵기술과 핵연료를 지원받는 동안 프랑스는 막대한 예산을 들여 핵잠을 자체 개발해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2017년 집권 이후 10만명 규모의 유럽신속대응군을 창설, 미국의 망토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신념을 펼쳐온 마크롱 정부다. 오커스 출범은 때마침 앙겔라 메르켈의 16년 집권을 끝내고 사민당(SPD) 주도 내각으로 전환하게 된 독일과 함께 유럽연합(EU)이 ‘제3의 길’을 걷도록 동기부여를 한 셈이다. 호주가 핵잠과 관련해 먼저 협의한 나라는 영국이었다. 영국이 EU를 떠나지 않았다면, 프랑스가 영국과 호주의 핵잠 논의를 미리 알게 됐을 터다.
영·불 경쟁관계에서 프랑스의 마이너스는 영국의 플러스다. 올 1월 공식적으로 EU를 떠나면서 존슨 정부가 영국의 세계 관여를 넓히겠다며 표방한 ‘글로벌 브리튼(Global Britain)’ 정책은 강력한 추동력을 얻게 됐다. 바이든 행정부 고위 관계자는 사전 브리핑에서 오커스 출범을 영국의 인·태 관여 확대를 위한 ‘선수금(down payment)’이라고 표현했다. 남중국해 해상 영유권 분쟁은 이제 아세안 국가들의 손을 떠나 ‘오커스 대 중국’의 구도로 바뀌게 된 것이다.
미·중의 긴밀한 협력이 성공조건의 하나인 한반도 평화방정식 역시 더욱 꼬이게 됐다. 남북 화해·협력은커녕 군비경쟁을 더욱 촉진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북한 외무성은 지난달 20일 오커스에 대해 “아·태 지역의 전략적 균형을 파괴하고 연쇄적인 핵군비경쟁을 유발시키는 매우 재미없고 위험천만한 행위”라고 지탄했다. 한국 입장에서 보면, 오커스 출범은 지난 5월 한·미 미사일지침 종료에 이은 미국의 잇단 대중 군사적 압박조치이다. 미국은 한국이 잠재적으로 중국 전역을 겨냥할 미사일 개발의 여지를 열어놓음으로써 대중 압박 카드를 챙겼었다.
군사기술 측면에서 핵잠 개발은 미사일 주권 확보와 함께 문재인 정부가 추진해온 양대 목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핵을 무기로 사용하지 않고 원료로 사용하는 것은 국제협정에 위반되지 않는다”면서 핵잠 개발을 희망해왔다. SLBM은 공교롭게 오커스가 출범한 지난 9월15일 독자 기술로 첫 시험발사에 성공했다. 하지만 핵잠은 핵연료의 농축을 허용하지 않는 한·미 원자력협정 탓에 개발에 착수하지 못하고 있다. 동맹이라고 같은 동맹이 아니다. 미국 조야는 핵잠 기술을 내줘도 무방한 호주와 한국을 똑같은 신뢰의 잣대로 평가하지 않는다.
국제정세는 백악관 주인이 트럼프에서 바이든으로 바뀌어도 한반도 평화와 반대방향으로만 움직인다. 갈수록 속도도 빨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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