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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진 반쪽/방북기

백두산 답사기

by gino's 2012. 2. 23.

[커버스토리]경향신문 기자의 백두산 답사기


 2003년에 다녀온 백두산 방문기를 2년 뒤에 다시 쓴 까닭은 그만큼 북한 쪽에서 백두산을 두루 둘러본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현대그룹 현정은회장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백두산 관광에 합의함에 따라 백두산관광의 현주소와 개발 가능성을 짚어본 글이다. 

백두산에는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기자가 북한 쪽에서 백두산 지역을 답사할 기회를 얻은 것은 2003년 9월말.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과 북측 사회과학자 협회가 공동 주최한 남북학술회의 취재차 백두산 지역에 4박5일간 머무르면서 삼지연과 천지, 보천보, 대홍단군 등 주요 관광명소와 사적지를 찬찬히 둘러볼 수 있었다.

백두산 일대의 주요 관광자원으로는 천혜의 비경을 자랑하는 천지와 승용차로 몇시간을 달려도 끊임없이 펼쳐지는 울창한 원시림, 천지 아래의 광활한 화산암 지대와 사구의 이국적 풍경, 밀영을 비롯한 독립군 유적지 등을 꼽을 수 있다. 여기에 찻집이나, 호프집, 노래방 등 외국인 및 남측 관광객들이 필요로 하는 위락시설만 갖춘다면 백두산은 국제규모의 관광단지로 거듭날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일행은 인천공항에서 중국 선양(瀋陽)을 거쳐 북한 땅을 밟았다. 하루가 온전히 걸리는 길이었다. 평양 순안공항에서 곧바로 프로펠러 소형 비행기로 갈아타고 삼지연을 향했다. 순안공항에서 비행기에 오른 뒤 한시간이 채 되지 않아 량강도 삼지연 공항에 도착했다. 북측이 군사용 비행장으로 건설한 삼지연 공항 활주로는 콘크리트였다. 드문드문 패어 보수공사가 시급해 보였지만 소형·중형 항공기가 이·착륙하기에는 큰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최소 4~5㎞의 직선적인 길 인상적

삼지연 공항에서 삼지연읍으로 가는 길은 비포장이었지만 길 양편에 70~80m 높이의 침엽수들이 늘어서 운치가 있었다. 40여분 소요됐는데 아스팔트 포장을 할 경우 30분 안쪽으로 운행이 가능해보였다. 하지만 주변 풍경을 찬찬히 살피기에는 비포장 그대로가 나을 듯했다. 이깔나무, 문비나무, 가문비나무, 접지나무가 도열한 길은 시원하게 뻗어 있었다. 한번 길이 뻗으면 최소 4~5㎞는 직선으로 연결된 것이 백두산 지역 도로의 특징이다.

북한의 변화는 백두산 관광의 거점인 삼지연읍에서도 볼 수 있었다. 삼지연읍의 베개봉호텔은 2002년 말에 시작한 증축·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3층 건물이던 1호동(객실 48개)의 보수공사와 2호동(4층·객실 80개)의 신축공사가 막바지 단계였다. 완공 뒤 최대 투숙객은 245명.

삼지연읍에서 16㎞ 떨어진 ‘리명수 노동자구’에는 수십채의 주택 겸 숙박용 건물이 들어서 있다. 여기는 천지에서 직선거리 70리를 지하로 흘러와 아담한 폭포를 이룬 리명수 폭포로 유명하다.

온도는 사철 내내 4℃이며 초당 0.8㎥의 수량을 유지한다는 게 당시 북측 안내인 강화숙씨(37)의 설명이었다.


2~3층인 이 건물들은 현지 주민들의 거처로 쓰다가 ‘유사시’ 관광객들의 민박 장소로도 쓴다는 게 북측 관계자들의 전언이었다. 민박을 할 수 있게 취사도구와 이부자리 등이 완비돼 있다는 얘기다. 이 건물들은 “외국사람들이 묵을 수 있는 수준으로 지어야 한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우선 1단계로 2000년 11월부터 삼지연읍 일대에 3000채를 지었으며, 앞으로 더 많이 지을 계획이라는 설명이었다. 삼지연군 외곽에는 전국에서 몰려들어 각종 건축사업을 벌이고 있는 ‘돌격대’들이 야영을 하고 있었다.

이밖에도 삼지연에는 300명이 묵을 수 있는 ‘제1여관’과 내무반식 숙박시설 100동이 마련돼 외국관광객들이 몰려와도 숙소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북측인사들은 홍보했다. 1동에 평균 200명이 묵을 수 있다고 하니 이 시설 하나만 해도 한꺼번에 2만명의 답사객을 소화할 수 있는 셈이다.

북측 답사객들을 위한 숙소로는 근로자각, 대학생각, 소년단각 등 3동의 건물이 함께 건설돼 있다. 지금도 사용하는 시설이어서인지 내부 상태도 깔끔했다. 한방에 6~8개의 침대가 놓인 백두밀영 인근의 숙소는 대학생각(300명), 근로자각(300명), 소년단각(250명) 등 8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북측으로선 ‘민족적 성지’ 답사객 숙소지만 정치색을 걷어내고 보면 울창한 원시림에 건설된 웰빙 숙소라고 해도 무방할 듯했다.

난방문제만 해결된다면 당장 남측의 대규모 관광객이 몰려와도 너끈하게 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북한 전역에서 몰려드는 답사객은 주로 삼지연에서 70㎞ 떨어진 혜산까지 열차로 와서 육로로 이동한다.



베개봉 앞에는 러시아형 펜션 즐비


삼지연군에는 백두산 지역 전체의 자연환경과 사적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백두관이 있어 백두산 일대를 미니어처로 만들어 두었다. 북측 답사객들은 본격 행보에 나서기 전에 백두관에 들러 전체를 조망하고 설명을 듣는다. 백두관에서 나오면 해발 1621m의 베개봉으로 가는 길이 뻗어 있다. 베개봉에는 북측 최고지도부의 지시로 국제경기를 치를 수 있는 규격의 스키장을 만들었다. 산세가 베개를 닮았다는 베개봉 앞에는 러시아형 펜션이 즐비해 과연 이곳이 북한인지 잠시 착각을 하게 된다.

베개봉 앞에는 스키장 외에도 빙상, 하키 등 동계스포츠 시설이 늘어선 체육촌이 짜임새 있게 들어서 있다. 북측은 실제로 1995년 동계 아시안 게임을 삼지연에 유치하려다가 반납한 적이 있다.

베개봉 호텔에서 천지까지는 30㎞ 정도. 천지로 가는 길에 북측 관계자들은 일행을 ‘정일봉’으로 안내했다. 소백수골에 솟아 있는 해발 1797m의 봉우리 정상에는 100t 무게의 화강암에 붉은 글자로 ‘정일봉’이라고 써 놓았다. 이 부근은 김정일 위원장이 태어났다고 북측이 주장하는 고향집과 밀영, 사령부 귀틀집 등이 보관돼 있다. 북한 당국이 문화재처럼 보호하고 있는 ‘구호목’도 볼 수 있다.

1930년대 후반기 백두산 일대에서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벌인 항일 빨치산 대원들이 나무에 써놓았다는 글들이다. 나무껍질을 벗기고 먹으로 써놓은 글은 대부분 유실됐는데 북측은 이를 화학적인 방법으로 발굴, 복원한 뒤 육각형 또는 원형 유리기둥 안에 보관하고 있었다. 이데올로기의 색채가 입혀진 정치구호가 주류를 이루지만 풍찬노숙하던 독립군들의 활약상에는 남이건 북이건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이천만 인민을 불러 일으켜, 우리 힘으로 나라를 독립해야 한다’ ‘내 고향 떠나올 때, 옷자락에 매달리며 꼭 왜놈치고 돌아오라던, 귀여운 누이동생 부탁 잊지 말자’는 내용이 눈에 띄었다.

변하고 있는 것은 백두산 일대 풍경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사람이 변하고 있었다. 변화의 신호는 베개봉 호텔에서 근무하는 젊은 여성들에게서도 감지됐다. 이 호텔 1층 기념품점에서 5년째 판매원으로 일한다는 여성(27)은 월급 2500원에 판매목표 초과달성시 성과급을 합하면 4000원의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평균 월급 2000원의 갑절이었다. 한 여성 복무원은 식사 때는 식당 의례원으로 일하다가 밤이 되면 호텔 2층의 매대(간이 판매소)에서 주류를 파는 투잡스를 실현하고 있었다.

2002년 도입한 ‘7·1 경제관리 개선조치’가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백두산 일대에서도 시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삼지연을 중심으로 각각 70㎞ 거리에 위치한 보천보와 무산지구 전투탑은 김일성 주석의 항일활동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적지다. 곤장덕 산마루와 가림천 사이에 위치한 보천보는 일본경찰의 주재소와 우체국 등은 물론 당시 총탄자국까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천지에서 잡아올린 산천어 회 별미

비포장 도로가 제법 험해서 적지 않은 불편이 따랐다. 보천보 가는 길에 일행이 탄 마이크로 버스 타이어가 펑크나 교체하는 데 한참을 소요하기도 했다. 일반 관광객이 방문하기에는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았다.

천지변에서 즐긴 호사스러운 점심식사 이야기를 끝으로 백두산 답사의 추억을 닫았으면 한다. 이날 점심은 극진한 북한식 손님접대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일행이 장군봉(병사봉) 답사에 이어 삭도(케이블카)를 타고 천지변에 내리니 넓은 자갈밭에 자리가 펼쳐져 있었다. 일행이 묵고 있던 베개봉 호텔 직원들이 일찌감치 나와서 음식 준비에 한창이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조그만한 떡메를 갖고와 답사객들이 직접 치게 하는 시간이었다. 자리마다 백두산 들쭉술과 백로술 등 고급술이 놓여 있었다.



평양에서 파견된 백산탐험대 대원들이 천지에서 잡아올린 산천어 회와 어죽이 별미였다. 당초 어류가 살지 않던 천지에는 1984년 6월14일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로 어미 산천어 100마리를 방류한 결과 현재 4만마리가 번성하고 있다는 게 백산 탐험대 대원들의 설명이었다. 여기에 조그만 풍로에 구운 고기와 술을 즐겼다. 마지막으로는 백산 탐험대 소유의 고무보트에 삼삼오오 올라 천지를 한바퀴 도는 것으로 3시간여 지속된 ‘호사스러운’ 점심행사를 마쳤다. 저 너머로 보이는 중국측 천지는 어딘가 부족함이 많아 보였다. 천지만을 놓고 볼 때 북한측에서 보는 풍경이 백화점이라면 중국측에서 보는 것은 구멍가게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천지를 보는 각도와 천지변 자갈밭의 넓이, 주변 산세 역시 비교 대상이 되지 못했다.

<정치부 김진호 기자 j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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