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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진 반쪽/방북기

여기는 평양, 비가 내린다

by gino's 2012. 2. 25.

2005.06.30. 10:29

"여기는 평양 비가 내린다"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던 1972년 어름에 처음 평양을 방문한 남측 기자들이 전한 평양 모습 가운데 아직도 회자되는 명 신문기사 제목이다. 냉전의 한복판에서 남북 지도부의 정치적 셈법이 맞아 이뤄진 일시적인 해빙이었을지언정 ‘여기’와 ‘평양’이라는 공간적 무대와 ‘비’라는 정서적 짠함이 섞이면서 묘한 울림을 만들어냈을 법하다. 기자는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어른들이 지켜보시던 흑백TV 화면에서 처음 판문점을 넘어 육로로 개성을 지나가는 남측 대표단의 자동차행렬을 본 기억이 어렴풋하다.

가는 길도, 오는 길도 유난히 비가 많았다. 평양은 세 번째 방문길이었다. 이산가족 상봉행사와 적십자 회담이 열리는 금강산과 개성공단 지역도 여러 차례 다녀왔다. 그러면서도 유독 이번 평양 취재 중에 위의 한 구절을 주머니 속 동전처럼 계속 들고 다닌 것은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냉전 시절의 잔재와 현재의 모습이 겹쳐지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 상황이 종종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만큼 적지 않은 생각거리를 남긴 취재였다.

인천공항로 막 진입하는 길목에는 3~4명의 반북단체 회원들이 북측 최고지도부를 비난하는 피켓을 들고 대표단을 태운 버스 코 앞에서 흔들어댔다. 불길한 전조였을까. 남측 당국대표단을 태운 대한항공 전세기 KE9815 편이 인천국제공항 주기장을 떠나 활주로로 진입하던 순간 기장은 기내방송을 통해 “북측에서 비행훈련이 많아서 출발시간을 늦춰줬으면 한다는 요청이 왔다”고 안내했다. 기장은 20여분 뒤 다시 기내방송을 통해 “평양지역에 뇌우가 오고 있어 출발을 1시간 30분정도 늦춰야 할 것 같다”고 정정방송을 했다. 정부 당국자들 중에는 두가지 방송 중 어느것이 맞는지 의아해하는 기자에게 서해직항로에서 디귿(ㄷ)자로 들어가는 남포 인근 해역부터 비구름이 잔뜩 몰려 있는 위성사진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취재진의 결론은 둘 다 맞다는 것이었다. 우중에 훈련을 할 가능성은 없지만 그 역시 북측에서 전한 말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북측은 이미 남북해외 민간부문이 우여곡절 끝에 합의한 대표단 규모를 민간 615명에서 300명으로, 당국 70명에서 40명으로 줄인 바 있다.

언뜻 비 오는 평양을 떠올렸고, 실제로 비행기가 인천을 이륙한지 50여분 만에 도착한 순안공항에는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장관급회담 북측 단장인 권호웅 내각 책임참사를 비롯해 최영건 건재공업성 부상, 이종혁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 등은 보장성원들과 함께 우산을 챙겨들고 그야말로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남측 대표단 영접준비에 열심이었다.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에도 남측 대표단은 북측 기자들의 요청으로 정부대표단, 자문단 등으로 나누어 활주로에서 단체로 포즈를 잡기도 했다. 전해지는 느낌이 있었다. 환대를 받고 있다고 느끼기에 충분했다. 출발 전 불길함은 덜해졌다.

일행은 마이크로 버스에 몸을 싣고 수양버들 가로수가 허리를 굽힌 ‘유경(柳京)’으로 들어갔다. 백화원 초대소로 가는 길은 금수산기념 궁전에서 좌회전을 해야했다. 오른쪽은 평양시내로 가는 길.

2년 전 평양을 처음 보았을 때 고대 로마와 비슷한 도시라고 생각했다. 곳곳에 기념비적인 건축물과 조형물이 많아 도시 전체가 거대한 박물관 또는 전시관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꼭 체제선전을 위해 건설한 ‘쇼윈도우라’고 까지 잘라 말하지는 않더라도 정치적 상징이 어린 모뉴먼트로 가득 찬 도시임에는 분명한 듯하다. 주체사상탑과 만경대학생소년궁전, 인민문화궁전, 4.25문화회관, 청년문화회관, 김일성경기장, 개선문 등은 처음 찾는 남측 방문자의 눈길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다만, 밤이 되면 관람객이 떠나고 적막이 감도는 박물관처럼 평양시내도 밤이 되면 텅 빈 무인공간이 된다.

 

남측 당국대표단을 태운 버스는 금릉동굴과 구구절 다리를 거쳐 대성구역에 위치한 백화원 초대소에 도착, 2각에 짐을 풀었다. 떠날 때 만해도 주암, 흥부 초대소였던 숙소가 갑자기 영빈관급으로 격상돼 있었다. 남측 언론에서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깜짝 회동’ 가능성이 집중 부각된 배경이기도 하다. 이 때 까지만 해도 예상 면담 성사 가능성은 채 10%가 안돼 보였다. 언론의 예상은 억측일 수밖에 없었다. 남북관계에선 한 개의 행사 또는 회담을 치르면서도 수없이 돌출변수가 생겨나지만 이번엔 드물게 기분 좋은 변수였다. 따지고 보면 이번 행사 자체가 ‘6.15로 돌아가는 여로’였던 만큼 김대중 전 대통령 일행이 정상회담차 머물렀던 백화원을 숙소로 잡은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북측 김기남 조선노동당 중앙위 당비서는 79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훤칠한 키에 눈빛이 형형했다. 북측의 오랜 대남라인인 림동옥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은 작은 키와 검은 뿔테 안경 속에서 날카로운 눈빛을 갖고 있어 대비가 됐다. 그는 국민의 정부 시절 ‘햇볕정책의 전도사’로 남북정상회담을 일궈냈던 임동원 세종재단 이사장과 오랜만에 해후하면서 “(정상회담 준비차) 처음 평양에 왔을 때도 비가 왔었죠?”라고 묻고는 “항상 비를 몰고 다니는군요”라고 말했다. 남북 대표들은 만날 때마다 비를 화제로 삼으면서 “올해 농사에 좋은 비”라고 입을 모았다. (기실 6.15공동행사 기간에 내린 폭우는 ‘나쁜 비’였다. 어렵사리 남측으로부터 지원받은 금싸라기 같은 비료 20만 톤을 모내기철 밑거름으로 뿌렸건만, 상당부분 폭우에 씻겨 가버렸기 때문이다. 농업 전문가들에 따르면 모내기 뒤 열흘 간 생육기간에는 10센티 정도만 물이 차 있는 상태에서 농약 기운을 벼가 흡수해야 하는 데 이때 비가 내리면 묽어져서 비료효과가 반감된다. 현실은 악수하는 정치인들과 동떨어져 늘 이리 냉정하다)

 

짐을 풀고 달려간 김일성경기장 입구에서는 북측 소학교, 중학교 여학생들이 무용복에 양말도 신지 않은 채 빗속에서 남북해외 민간대표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비옷을 입고 천리마 동상에서 개선문 옆 경기장까지 1킬로 정도 거리를 행진해온 대표단이 도착하면서 대회장은 달아올랐다.

정장관과 임동원 세종재단 이사, 박재규 전 통일부 장관등 당국 대표단의 원로들은 이때부터 각종 행사 참관시 주석단에 자리를 잡았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민간잔치에 ‘객(客)’이 끼어 주인행사 한다는 비아냥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6.15공동선언 이후 지난 5년 간의 역사는 민과 관이 어우러져 써온 것. 공동행사에 어느 한쪽이 배제돼야 한다는 고집 자체가 부질없는 문제제기가 아닌가 싶다.

북측은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과 김영대 조선사회민주당 위원장 류미영 천도교 교무 등 중량급 인사들이 정장관 일행을 맞았다.

 

6.15공동선언 및 남북정상회담은 민간이 아닌 당국이 주도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후 6.15공동행사 또는 8.15공동행사가 민간주도로 이뤄진 데는 남측 당국의 조심성 때문이었다. 남측 당국은 정부가 참가할 경우 정당, 사회-종교단체 등과 한 묶음으로 분류됨으로써 남측 사회를 아우르려는 북측의 통일전선전술에 이용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 참가하지 않았었다. 이번엔 상황이 달라졌다. 무엇보다 지난 5월 차관급 회담을 시작으로 10개월 동안 동결됐던 당국간 대화가 재개되고, 북핵 위기가 중요한 고비를 맞으면서 남측 당국은 6.15공동행사를 중요한 계기로 판단, 참관단을 보내게 됐다. 북측 최고지도부와 남북관계와 북핵위기라는 두가지 핵심의제를 놓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질 수도 있다는 기대감에서였던 것이다. 이러한 기대는 마지막 날인 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정장관 및 6.15 정상회담의 주역을 대동강 초대소로 초청, 전격 회동을 가짐으로써 성사됐다.

 

북한 취재를 하면서 늘 잊지 않으려고 애쓰는 원칙중 하나는 ‘균형감각’이다. 두개의 첨예하게 다른 체제, 반세기를 다른 토양에서 자란 사람들 사이에서 어느 한쪽에 치우칠 경우 최소한의 객관적 사실마저도 왜곡해서 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반북-친미시위를 벌이는 사람들도, 북한 이야기만 나오면 가슴 뿐 아니라 정신까지 말랑말랑해지는 정서적 친북도 경계 하고 싶다. 사실, 이 분야 취재를 하기 전에는 햇볕정책의 심정적 동조자였다. 하지만 이제는 햇볕정책을 지지하되 냉철한 관찰자이자 평가자이고자 한다.

 

우여곡절 끝에 적지 않은 의미를 남긴 6.15민족통일대축전이었지만 남북이 아직도 냉전시대의 징한 연대기를 끝내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 소동도 있었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연회장에서 부른 북측 영화 ‘이름 없는 꽃’의 주제곡 ‘기쁨의 노래 안고 함께 가리라’가 야기한 파장은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14일 평양 만수대예술극장 연회장은 남북 내각 요인들이 대면식을 갖은 화기애애한 자리였다.

 

 1990년대 초반 문화유적 답사차 한달여 동안 북측에 체류했던 유청장은 당시 안내를 맡았던 동료가 즐겨 부르던 노래를 떠올렸고, 북측 김수학 보건상의 청으로 부르게 됐다. “남모르는 들가에/남모르게 피는 꽃/ 그대는 아시는가/이름 없는 꽃”. 일부언론은 이 영화가 한국전쟁 말기 음지에서 일하는 북측 스파이를 다룬 영화라는 점에 착안, “북한 전쟁영웅을 찬양하는 노래”라는 레테르를 붙였다. 5~6개 중앙일간지가 사설로 비난했고 유청장은 17일 오전 “본의 아니게 물의를 일으켰다”면서 사과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유청장 본인은 구성진 가락을 기억해 노래를 불렀고, 일부 언론은 영화의 배경에만 확대경을 들이댔다. 정장관-김위원장의 ‘깜짝 면담’으로 다행히 제2의 강정구 교수 사건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유청장 파문’에서 볼 수 있듯이 남북이 만나는 접점에는, 여전히 ‘지뢰’가 매설돼 있다. 멜로디만을 좇아 노래를 부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알러지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비겁하게 판단을 미루는 양비론이 아니다. 두가지를 모두 끌어안기 위해서는 뜨거운 가슴만으로 안된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직면해야 할 현실이라는 점이다. 어느 한쪽만 고집하면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은 그만큼 적어진다.

 

북측 동료에게 ‘여기는 평양, 비가 내린다’는 말이 자꾸 생각난다고 하자. “반복은 죽음”이라고 한마디 던졌다. 무릇 글을 쓰는 사람은 반복을 하면 안된다는 말이었다. “그럼 어떻게 반복하겠어. 그러면 ‘여기는 평양, 또 비가 내린다’고 할까”라며 웃어 넘겼다. 농담에도 진실은 있다. 반복은 죽음이다! 또다시 지난 반세기간의 대립과 반목을 반복하면 우리 민족에는 죽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도 역사의 수레바퀴를 역진시키지는 못한다. 하지만 ‘낭만적 가슴’ 만으로 덤빈다면 1mm도 전진시키지 못한다. 같은 논리로 차가운 냉전논리만으로도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정치적 목적에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건성으로 돌리는 시늉만 한다면 그 역시 역사의 징벌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평양에는 아직 비가 내리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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