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이 강을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은 이념에도 적용된다. '좌파'라는 말도 역사적, 사회적 배경이 다른 나라에서는 귤과 탱자만큼의 다른 의미가 된다. 유럽에서는 통상 온건 사회민주주의자를 말한다. 1997년 영국 총선 이후 우리나라에서 유독 회자됐던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은 여기서 다시 한번 물타기를 한 듯하다. 하지만 같은 말이 한반도 남쪽으로 건너오면 영락없이 '빨갱이'가 된다. 좌파라는 말에 뿔달린 빨갱이의 이미지가 담겨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우리만의 역사적, 사회적 경험이 퇴적된 결과다. 올해도 어김없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TV토론회에 나온 여야 경선후보들이 아전인수격으로 '좌파'의 정의를 내렸다. 제철 만난 일부 식자층들도 열심히 TV화면에 얼굴을 내밀었고, 몇몇 보수언론은 습관처럼 좌판을 깔았다. 느닷없이 기든스가 심판관으로 등장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기든스가 좌파라고 규정했으므로 현정부는 좌파라는 한나라당 측의 주장이 그것이었다. 많이 탈색됐다지만 좌파라는 말이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음산한 뉘앙스를 갖고 있으며, 그 때문에 질긴 생명력을 갖고 있음을 확인시켜준 대목이다.
온갖 '게이트'로 인해 한동안 색깔론이 뜸하다고 마음을 놓으면 안된다. 때려도, 때려도 튀어나오는 오락실의 두더쥐처럼 연말 대선전에 반드시 다시 튀어나올 메뉴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될 사람은 이념적 정체성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고 목에 힘줄 돋우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정통보수 또는 자유민주주의자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여기서 다시 귤과 탱자의 차이를 외면하는 몰역사성이 노정된다. '자유민주주의'가 대세라고? '반공'의 유사어쯤으로 의미가 변질된 우리와 달리 '이념'으로서의 자유민주주의는 불행히도 유럽에서 마이너리티로 전락한지 오래다.
프랑스 자유민주(DL)당은 올 대선 1차 투표에서 3.91%를 얻어 우파연합 내에서 간신히 숟가락을 하나 얹어놓았을 뿐이다. 영국 자민(LD)당은 작년 총선에서 7.8%를 얻었고, 독일 자민당(FDP)은 현재 연방하원의 6.2%를 점하고 있다. 대척점에 있는 프랑스 공산당과 옛 동독 공산당의 후신인 민사당(PDS)도 마이너리티로 전락했다. 정확히 말하면 '극단의 시대'의 다른 이름이었던 '이념의 시대'가 끝났다. 굳이 신경향을 들라면 올 프랑스 대선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극우파 노(老)정객, 르펜 정도나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선진국'의 경우 선거 쟁점으로서 이념이 용도폐기 된지는 오래다. 좌도, 우도 아닌 '제3의 길'이라는 조어가 나온 것 자체가 이념의 시효가 끝났음을 증명하지 않는가. 좌와 우만 몸을 섞은 건 아니다. 세계는 보다 다원적인 고민을 하고 있다. 환경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살림이 푼푼한 보수층일수록 무공해 농산물을 찾는다. 심지어 과거 무정부주의자들의 소굴 정도로 분류됐던 녹색당을 지지하기도 한다. 유럽통합을 반대하는 주권주의자들은 각국의 좌.우파에 공히 존재한다. 연대를 강조하던 좌파에서 주권주의자가 나오는가 하면, 주권을 강조하던 우파에서 통합주의자가 나오고 있다. 이념적 편가르기와 상관없이 사안별로 정치적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입만 열면 글로벌 스탠더드를 주장하는 사람들일수록 이러한 정치적 다원화에는 꿀먹은 벙어리가 된다.
21세기 첫 대선을 앞둔 한국사회의 우선순위는 보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 톨레랑스(차이)는 인정한다. 그러나 뜬금없는 이념논쟁만은 그만두었으면 한다. 유럽에서 쓰다 버린 '이념의 시체'들을 놓고 왈가왈부함으로써 국민이 얻을 것은 맹세코 없다. 아, '주적'을 코앞에 두고 무슨 말이시냐고? 가상의 공격에 대비해 어떤 무기로, 어떻게 적을 무찌르겠다는 복안을 가진 유능한 지휘관을 두면 되지 않는가. 우리에게는 국가적 명운을 갈라놓을 현안들이 그밖에도 너무도 많다. 국가를 이끌어갈 아이디어가 빈약한 후보일수록 죽은 이념시비로 판을 퇴보시킨다.
김진호 국제부 차장jh@kyunghya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