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 재선에 성공한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악화된 대미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이었다. 취임 며칠만에 런던으로 날아가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에게 미국과의 화해중재를 부탁하고 가능한 한 이른 시일내 워싱턴에서 부시 대통령과 회담을 갖고 싶다는 러브콜을 독일 언론에 띄웠다.
선거판에서 아무리 급했다고 해도 슈뢰더 정권의 반미 유세는 이라크 침공을 앞두고 국제여론 모으기에 경황이 없던 조지 부시 미 행정부의 의표를 찌르는 것이었다. 유세 도중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의지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의사를 공공연하게 드러내더니, 급기야 도이블러 그멜린 법무장관이 부시 대통령을 히틀러에 비유하면서 양국간 반세기 밀월관계에 결정적인 흠집을 냈다. ‘독일의 배반’에 백악관은 물론 미국 조야가 배신감을 느낀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모험’으로까지 묘사된 슈뢰더의 반미 입장은 유권자들의 표로 보상을 받았다. 슈뢰더 정부도 표면적인 유화제스처와 달리 미국관을 아직 시정하지 않고 있다. 이라크 침공에 대한 반대를 여전히 고수함으로써 선거용 주장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하고, 미국민에 대한 국제형사재판소(ICC)의 기소면책권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종전 뒤 국제무대에서 미국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이 태생적으로 불가능했던 독일에서 반미 목소리가 힘을 얻는 이유는 간단하다. 테러척결을 명분으로 전쟁의 종을 난타하고 있는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가 반발을 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거수기’ 역할에 만족했던 독일뿐이 아니다. 일부 유럽 지도자들은 유권자들의 반미 정서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찰스 케네디 영국 자민당 당수는 지난달 말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권교체를 추구하는 미국의 제국주의에 대해 공개 경고했다. 해프닝성 발언이 아니었다. 전당대회에서 행한 연설이었다.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은 뒤뜰에서도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남미 최대 경제권인 브라질의 기득권층은 오는 6일 대선을 앞두고 전전긍긍하고 있다. 좌파 노동자당(PT) 루이스 이냐시오 룰라 다 실바 후보의 승리가 확정적이기 때문이다. 친미 우익 기득권층이 득세해온 브라질에 선반공 출신의 반미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면 사회·경제적인 격변이 일어날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하다.
최근 브라질 경제위기를 놓고 룰라의 득세를 우려한 월스트리트 금융자본의 농간이라는 분석은 이래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정작 룰라 자신은 대외부채에 대한 지불유예를 비롯한 혁명적인 조치는 없을 것이라며 온건한 입장을 내비치고 있다. 다만 금융투기보다는 생산활동을 장려하겠다며 미국과 국제통화기금(IMF)의 지도에 충실했던 브라질 경제정책을 전면 개혁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빌 클린턴이 재임중 말했듯이 미국은 이제 ‘필수불가결한 나라’이다. 정치·경제적으로 미국을 중심으로 도는 국제질서에서 궤도를 이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미국의 압도적인 우위를 인정하더라도 나라마다 독자적인 활동공간은 필요하다. 단극화·세계화된 국제정세는 국화빵같이 동일한 처방, 예외없는 행동통일을 강요하고 있지만 국가적인 우선순위까지 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미국이 당기는 구심력과 각국의 우선순위라는 원심력이 균형을 이룰 때에야 조화로운 국제관계도 비로소 가능해진다. 활동공간을 여는 것은 지도자의 몫이다.
〈김진호/국제부 차장〉
입력 : 2002-10-02 18:31:05 /정동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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