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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정동탑

<정동塔> 경기지사와 오키나와 지사

by gino's 2012. 2. 25.

[경향신문]|2002-07-25|08면 |45판 |오피니언·인물 |컬럼,논단 |1629자

 

손학규 경기지사는 도지사로서의 첫 공식행사로 서해교전에서 전사한 해군 장병들의 영결식에 참가했다고 지난 2일 취임사에서 강조했다. 경기도의 지역적 특성을 '통일시대의 전진기지'이자 '안보의 보루'라고 정의한 그로서는 나무랄 데 없는 처신이었다. 같은 취임사에 따르면 경기도의 주인은 도민이어야 한다. 하지만 지난달 13일 양주군 지방도로에서 미군 궤도차량에 깔려 죽은 효순.미선양 사건의 처리과정을 보면 경기도의 주인은 도민이 아닌 것 같다.단발머리 여중생 미선.효순양이 숨진 날은 공교롭게 손지사를 당선시킨 지방선거가 있던 날. 평소 같았으면 학교 수업을 받고 있을 시간에 친구네 집에 가다가 변을 당했다. 관내에서 발생한 비극이건만 손지사는 공식적으로 침묵하고 있다. 성명을 통해 사고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려고 노력하거나, 적극적인 해결 의지를 표명한 적도 없다. 경기도는 되레 이임하는 러셀 L 아너레이 소장(미 2사단장)에게 '관례대로' 감사패 수여를 검토했다가 취소했다.

주한 미군의 주둔국 지위 문제는 물론 국가적인 사안이다. 일개 도지사가 왈가왈부하기에는 현실적인 제약도 있다. 아마도 정치학 교수 출신인 그는 주한미군의 중차대한 전략적 중요성 또는 한.미 관계에 미칠 악영향을 고려한 듯하다. 그 결과 침묵을 지키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는지도 모른다. 손지사의 '부재' 이유로 "도가 나설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답한 도 관계자의 말이 이를 입증한다. 하지만 일본의 한 목민관은 사뭇 다른 행보를 보여주었다.

지난 1995년 9월4일 미군 병사 3명이 관내 소학교 여학생을 해안가에서 성폭행하자 오타 마사히데(大田昌秀) 오키나와현 지사는 분노한 주민들 편에 섰다. 해당 병사들에 대한 사법처리는 물론 오키나와 주둔 미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대담성'을 보였다. 미군은 열흘 만에 신속하게 사과했지만, 세치 혀로 돌릴 수 있는 민심이 아니었다.

이 사건 이후 일본이 미군 피의자의 신병인도 규정을 비롯한 미.일 주둔국지위협상(SOFA) 보완책을 이끌어낸 힘은 중앙정부가 아니었다. 현지에서 발원해 일본열도를 휩쓴 여론이었으며, 그 여론의 중심에 오타 지사가 있었다.

주일 미군시설의 75%가 밀집된 오키나와현의 지사가 되면서부터 오타 지사는 당연히 미군주둔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비용에 눈을 돌렸다. 취임 초기인 91년엔 워싱턴을 방문해 미군기지의 축소 또는 철수를 바라는 주민들의 염원을 전달했다. 일본 영토의 0.6%를 차지하는 섬의 수장 자격으로 미국 정계 및 재계 지도자들과 당당히 회담을 가졌다. SOFA 협정 개정 여부를 현단위 주민투표에 부쳐 91%의 찬성을 끌어내기도 했다. 이 모든 게 '주민의 이름으로' 가능했다.

경기도는 오키나와처럼 미군 밀집지역이다. 미군이 주둔하는 한 말썽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도지사가 '안보'만 힘주어 강조하고 주민들의 '안전'을 뒷전으로 둔다면 어처구니 없는 비극과, 그보다 더 어처구니 없는 처리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사고 발생 한달이 다돼서야 피해 유가족들을 방문하고, 사고가 난 56번 지방도로를 확장하는 것만으로 도지사의 책무가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희망을 열어가기 위해서는 절망부터 씻어내야 한다. 15세 두 여중생은 참으로 '초라한 모양으로' 우리 곁을 떠났다. 남은 우리는 더 초라하다.

김진호 / 국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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