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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정동탑

<정동탑> 6월, 월드컵, 두소녀

by gino's 2012. 2. 25.

[경향신문]|2006-06-06|26면 |45판 |오피니언·인물 |컬럼,논단 |1572자

 

2002년 월드컵 포르투갈 전을 앞둔 6월14일 아침, 일부 조간신문 사회면에는 200자 원고지 2장 안팎의 단신이 실렸다. 전날 경기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 56번 지방도로에서 두 여중생이 훈련중이던 미군 궤도 차량에 깔려 숨졌다는 내용이었다. 16강의 꿈★을 이뤄줄 결전의 아침, 언론의 관심조차 끌지 못했다. 이후 아이들의 죽음 앞에서 대∼한민국 어른들이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월드컵 열기가 식고 난 뒤 전국은 '새삼스럽게' 두 소녀의 죽음을 슬퍼했고, 부박한 언론도 뒤늦게 호들갑을 떨었다. 여야 선량들 역시 월드컵 기간 동안 유독 국사에 바빴는지 7월29일에야 미군 당국에 사건 조사내용 공개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경기도는 '관례대로' 이임하던 러셀 L 아너레이 미 보병2사단장에게 감사패 수여를 검토했다가 황급하게 취소하는 촌극을 연출했다.

효순.미선이의 죽음은 이후 우리 사회 극심한 대립과 갈등의 한가운데 놓였다. 그해 11월22일 사고를 저지른 미군 2명에게 무죄평결이 내려지자 국민의 분노는 임계점에 다다랐다. 서울시청앞 광장과 광화문에서는 한동안 수만, 수십만개의 촛불이 밝혀졌다. 북핵 위기 재발에 즈음해 한.미 동맹이 굳건해야 산다는 민족적 생존논리가 민족적 자존심의 요구를 눌렀다. 이듬해 이라크 파병 반대 시위에 촛불은 다시 등장했으며 대중의 관심이 식을 무렵 광화문 네거리에 세워졌던 추모 촛불기념비는 종로구청에 의해 '불법건조물'로 철거됐다.

효촌리의 눈물은 대추리의 절규로 바뀌었을 뿐 한.미간 일그러진 관계는 매일반이다. 전방주시 의무를 태만히 한 미군 운전병과 관제병에게 과실치사(negligent homicide) 혐의를 적용하지 않았던 미측은 이제 '인간건강에 대해 잘 알려진 급박하고 실질적인 위협'이 아니면 미군기지 환경오염 치유를 못해주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그들의 죽음을 소화해내지 못하고 있다. '감정적 반미의 상징'이라는 눈총과 '자주 평화의 깃발'이라는 외침이 엇갈리고 있을 뿐이다. 접점은 요원하다.

아, 어른들이 한 일이 하나 있긴 하다. 사고 당시 폭이 6.6m에 불과했던 56번 지방도로를 4차선으로 확장했다. 도로 폭 때문에 사고가 났다는 편리한 문제의식이 5.31 지방선거 와중에 김문수 경기도지사 당선자의 입에서 다시 튀어나온 것을 보면 그들의 죽음이 남긴 의미는 고작 '6.6m'에 머물고 있으며, 그게 우리의 정확한 수준인 것 같다.

그사이 월드컵에 대한 국민적 열기는 맹목적 애국주의와 상업주의의 탐욕을 먹고 성장산업이 됐다. 아직 본경기 휘슬조차 울리지 않았건만 평가전만 열려도 광화문과 시청앞 광장은 발디딜 틈 없이 붐빈다. 거대기업에서 영세상인까지 좌판을 깔고 호주머니를 노린다.

오는 13일은 독일월드컵 한국 대 토고전이 열리는 날이다. 공교롭게 효순.미선이를 떠나보낸 날이기도 하다. 그날, 광화문을 붉게 물들일 '악마'들은 함성을 내지르기 전에 찰나일지언정 추모의 염을 표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월드컵 치매'에 걸려 그들의 죽음을 집단으로 외면했던 우리의 도리가 아닌가 싶다. 축제와 시위를, 환호와 울음을 한장소에서 터뜨려야 하는 기막힌 현실은 한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김진호
국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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