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2001-02-01|08면 |45판 |국제·외신 |컬럼,논단 |1112자 |
민심(民心)은 과연 천심(天心)일까. 지구촌 곳곳에서는 종종 '피플파워'의 드라마가 연출된다. 지난해 베오그라드가 그랬고, 최근엔 필리핀 마닐라가 무대가 됐다. 거리로 뛰쳐나온 민심이 평화로운 정권교체를 가져올 때, 국제부 기자들은 대개 '벨벳 혁명'이나 '민주주의의 승리'란 찬사와 의미부여를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게 아닌데…" 하는 물음표가 종종 떠오른다.베오그라드 피플파워의 배후에는 미 중앙정보국(CIA)이 개입했다는 혐의가 짙다. 유고의 민주화를 지원한다는 명분 하에 적지 않은 CIA자금이 투입됐다는 사실은 뉴욕타임스의 보도에서도 확인된다. 당시 민주주의의 선봉으로 미화되던 유고의 독립언론 종사자들이 베오그라드의 여느 샐러리맨들 보다 더 많은 봉급을 받았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밀로셰비치를 퇴진시킨 피플파워가 민중의 자생적 함성이라기 보다는 워싱턴 한구석에서 짜여진 시나리오에 의한 것이라는 의문을 떨칠 수 없다. 지난 19일 조지프 에스트라다를 실각시킨 마닐라의 피플파워는 또 다른 의문을 던진다. 처음엔 부패한 에스트라다의 당연한 퇴진과,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의 산뜻한 새출발로만 보였다. 하지만 서민의 대통령이 결국 명문가의 대통령으로 대체됐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필리핀의 정치와 경제를 과점(寡占)해 온 명문가 출신인 아로요 대통령은 기득권층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태생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멀리 스페인 식민지 시절부터 기득권을 독식해온 40여 명문가들이 민중 위에 여전히 군림하고 있다는 점에서 필리핀은 '민중의 나라'와 거리가 멀다. 에스트라다가 필리핀의 뿌리깊은 족벌정치 체제에서 돈없고, 빽없는 배우출신의 대통령으로 서민의 희망이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과정에도 문제가 있었다. 필리핀 스타신문은 군부출신 피델 라모스 전 대통령이 군부를 움직여 반 에스트라다 대열에 낄 것을 독려했다면서 진정한 민중혁명으로 보기 힘들다고 논평했다. 주연은 아로요였지만 감독은 라모스였다는 지적이다. 피플파워의 드라마는 스타를 탄생시킨다. 그러나 스타들이 민심 만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외부 또는 내부의 빅 브라더(Big Brother)들이 두는 '거대한 체스판'의 '말'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김진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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