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계 읽기/인사이드 월드

인사이드 월드/ '생명 흥정' 에이즈 제약사의 상혼

by gino's 2012. 2. 25.
[경향신문]|2001-03-08|08면 |45판 |국제·외신 |컬럼,논단 |1031자
흔히 자유무역을 게임에 비유한다. 공정한 게임을 위해서는 반드시 룰(rule)을 준수해야 한다는 앵글로 색슨의 윤리가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지적재산권을 보호하고, 관세장벽을 낮춤으로써 상품의 유통을 물 흐르듯이 하자는 것이 세계화의 본령이다. 얼핏 보면 썩 괜찮은 논리다. 하지만 사람의 목숨이 걸려 있다면 차원이 달라진다.남아공 프리토리아에서는 지금 '세기의 재판'이 벌어지고 있다. 원고는 글락소스미스클라인을 비롯한 39개 다국적 제약회사들. 남아공 정부가 지난 97년부터 시행중인 국내법이 화근이 됐다.

소위 '게임의 룰'을 어겼다는 게 원고측의 주장이다. 이 법은 에이즈 환자들에게 값싼 치료제를 공급하기 위해 제정한 것이다. 제3세계 또는 국내 제약회사가 선진국 제약회사들의 특허권을 무시하고 만든 값싼 약의 유통을 허용했다. 한마디로 불법복제 의약품을 합법화시킴으로써 '시장의 질서'에 도전한 것이다. 인구 4천5백만명 가운데 4백20만명이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황에서 세계무역기구(WTO)가 규정한 로열티를 지급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유있는 저항'은 들불처럼 확산되고 있다. 하루에 600명이 에이즈로 죽어가는 케냐 정부도 6일 남아공과 비슷한 법을 만들겠다고 공표했다.

값싼 치료제를 무상으로 공급해 에이즈 사망률을 절반으로 떨어뜨린 브라질 정부도 WTO에 피소됐으며, 태국의 유사한 의약품 공급정책도 미국 정부의 압력을 받고 있다.

성난 주민 수천명은 재판이 시작된 5일부터 프리토리아 고등법원 주변에서 연일 시위를 벌이고 있다. '환자들에게 생명을'이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들고 미국 대사관 앞에서도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자본의 논리'는 완고하다. 다국적 제약회사들은 특허권 박탈에 따른 피해를 감수할 수 없다면서 고집을 꺾지 않고 있다. 전세계 에이즈 보균자는 모두 3천6백만명. 인심은 곳간에서 난다지만 그들의 정연한 시장논리는 추악한 상혼으로 보인다. 어떤 경우에도 생명은 '룰'에 우선한다. 프리토리아의 법정에 오른 것은 세계화의 도덕성이다.

김진호 기자 jh@kyunghyang.com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