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집권 이후 17년 동안 10만 명당 25명이었던 알코올중독 사망자가 8명으로 줄었다. 자살은 39명에서 13명으로, 살인 피해자는 28명에서 6명으로 각각 줄었다. 영아사망률은 정상출산아 1000명당 19명에서 4.4명으로 줄었다. 유아사망률은 소련 쇠락의 지표였지만, 유엔아동기금 통계를 기준으로 미국보다 개선됐다. 보건의료 분야의 취약성을 개선하지 못한 미국에선 1000명당 5.5명의 유아가 사망한다.
소련 해체, 15년 전 내다본 '예지자'
프랑스 인문학자 에마뉘엘 토드(72)를 읽으려면 인구통계학과 역사인류학적 맥락에서 나오는 숫자에 주목해야 한다. 25세의 박사과정생이던 1976년 소비에트 체제가 생명을 다했음을 규명해 낸 숫자들이기도 하다. 그가 1970년대 초 영아사망률과 자살률 등의 기본적인 인구통계학적 숫자로 소련의 붕괴를 예측,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같은 연구 방법으로 이번엔 미국과 서구 패배의 예지자로 등장했다. 작년 말에 펴낸 <서구의 패배(La Défaite de L’Occident)>를 통해서다. 소련의 몰락을 예고한 <최후의 추락(La Chute finale)>과 달리 미국의 몰락을 예고한 건 아니다. 다만 미국이 왜 패배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인문학적 분석에 치중했다. 토드의 새로운 분석이 미국 보수우파의 관심을 끄는 이유다.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각국 지도자와 장관, 전문가들이 내놓는 말에는 신뢰감이 실리지 않는다. 미래가 불투명할 때 토드의 방법론은 전혀 다른 맥락에서 국제정치의 흐름을 볼 기회를 제공한다. 토드의 생각은 2년 여 전에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국과 서방이 이미 졌다"는 헤드라인으로 작년 말부터 각국 언론에서 소비됐다. 그러나 <서구의 패배>가 기존 세계관에 던진 다층적인 함의는 단순히 우크라 전쟁에 머물지 않는다. 4·10 총선 뉴스가 홍수를 이루는 시점에 한 발 떨어져 세계를 조망하기에 유용한 주제다.
인구 적은 러시아가 미국과 대치 가능한 비결
우크라 전쟁에서 러시아의 승전을 예견한 경로 역시 숫자에 근거한 분석이었다. 작년 8월부터 분명해진, 미국과 서방이 우크라에 충분한 무기를 공급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고등교육 이수자를 기준으로 러시아에선 23%가 공학을 전공하지만, 미국에선 7%에 불과하다. 토드는 인구가 미국의 42%에 불과한 러시아가 미국보다 더 많은 엔지니어를 배출하는 게 무기 생산에서 미국과 대등하게 대치하는 힘의 원천으로 설명했다. 인구는 미국이 3억 4100만 명이고, 러시아가 1억 4400명이다. 성적 좋은 학생들이 죄다 의대로 몰리는 대한민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토드는 인문학적 분석에 그치지 않는다. 소련 해체를 내다본 혜안을 가다듬어 미국과 서방의 쇠퇴라는 국제정치의 미래로 확장한다. 토드는 미국이 주도하는 집단 서방이 자유와 진보이고, 러시아가 압제라는 이분법을 깬다. 주장의 한 축은 세계의 상당 부분이 신자유주의 가치 시스템을 거부하고 있다는 점이다. 분기점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다. 이를 기점으로 제3 세계에 공장을 아웃소싱해 대량 소비를 가능케 했던 신자유주의 경제모델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됐다고 짚었다. 글로벌 사우스(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개도국) 엘리트 계층은 물론, '집단 서방'의 노동 계층도 더 이상 환영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시대를 거치면서 값싼 중국산 제품에 일상적으로 의존하면서도 자유무역을 반대하는 풍조가 굳어진 지 오래다. 토드는 성적 소수자(LGBTQ) 혁명이라는 사회문화적 변화를 정치, 경제적 변화의 근거 하나로 설명한다. 그런데 토드는 왜 성적 개념의 변화를 러시아의 '매력자산(소프트 파워)'으로 해석할까.
인도·튀르키예·사우디에 러시아 매력자산은?
LGBTQ 혁명이야말로 서구 기독교 문명권의 종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2000년 이후 미국 영향력 아래에 있는 거의 모든 나라는 동성애자 결혼을 허용하고, 성전환을 인정했다. 가족은 토드의 분석에서 중요한 요소다. 기독교적 가치의 종말은 물론, 가부장 사회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권위가 양립하는 사회로 바뀌었다. 집단 서방에서 젠더 문화의 변화는 전통적으로 러시아를 불신해 온 이란과 튀르키예, 사우디아라비아의 정부와 국민이 러시아에 호감을 갖게 된 계기의 하나라는 것이다. 도덕 문제가 사상 처음으로 국제관계의 중요한 요소로 등장했다는 게 토드의 주장이다. 푸틴의 러시아는 단호한 반 LGBTQ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이란과 튀르키예 등이 러시아산 원유·천연가스에 빨대를 꽂으려는 경제적 판단뿐 아니라 문화적 동질감도 관계 강화의 동기라는 판단이 흥미롭다.
이 대목은 이슬람권과 힌두교권뿐 아니라 트럼프와 마린 르펜 등 미국과 유럽 각국의 극우 포퓰리스트들이 거의 예외 없이 푸틴에게 호감을 갖는 이유도 설명한다. 구미의 극우 포퓰리즘은 무슬림 이민자들을 증오하고, 기독교 정체성의 위기에 분노하며, 가부장 문화를 옹호한다.
토드는 "오만에 가득한 서구는 여전히 가부장적이고 동성애를 혐오하는 세계의 더 많은 부분으로부터 의심의 대상이 됐음을 모르고 있다"라면서 푸틴의 반 LGBTQ 노선을 비난하는 것은 되레 '푸틴의 게임'에 말려드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토드는 러시아가 동성애 혐오나 성전환 반대 정책으로 세계의 많은 나라들로부터 소외되기는커녕 "상당한 소프트 파워를 얻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짚었다. 지난 세기 각국의 노동 계층에 먹혔던 공산주의 대신 이번에는 러시아의 보수적인 소프트 파워가 먹히고 있다는 것이다. 토드는 젠더 혁명을 지지하지만, 성전환에는 선을 긋는다. 그러나 개인의 가치관을 분석 결과에 투영하지 않는다. 미국이 '허무의 제국(Nihilist Empire)'으로 바뀌었다는 결론을 도출하는 근거로 젠더 혁명을 내놓을 뿐이다.
더 이상 전통을 바라보지 않는 미국 엘리트
그런데 도덕적으로 서구가 옳고, 나머지 세계가 틀렸다는 거짓의 맹신이 어떻게 군사 동맹이자 외교적 파트너로서 미국의 신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미국 네오콘(신보수주의) 학술지 '아메리칸 컨서버티브'의 스콧 매코널 편집장이 던지는 질문이다. 매코널은 이 대목에서 조 바이든 행정부의 남성 국방 관료들이 치마를 두르고 화장을 한 얼굴로 돌아다니는 밈(meme·모방)이 소셜미디어에서 풍자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토드의 책을 통해 여장 국방 관료들의 밈이 미국의 새 이데올로기의 징후일 수도 있다는 발견을 한 것이다. 토드는 미국의 도덕적 붕괴가 WASP (백인·앵글로 색슨·개신교)의 기성제도와 전통이 흔들린 데서 기원을 찾는다. 막스 베버가 설파한 역동적인 자본주의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사회가 됐다는 말이다.
윤리적으로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미국의 새 지배층은 국가나 미국민의 정체성에 특별한 애착을 갖지 않는다. 미국이 허무의 제국이 된 이유다. 지배 엘리트층은 외려 미국의 과거에 끊임없이 반란을 꾀하고 미국식 전통에 적대적이다. '트럼프 현상'도 이상한 미국의 한 부분이다. 토드는 프랑스를 비롯한 서방 국가들이 이러한 미국을 추종하면, 재앙이 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보수는 기존 질서의 붕괴 조짐에 민감하고, 진보는 새로운 질서의 태동 조짐에 관심을 둔다. 토드의 책이 각국 보수우파 사이에서 더 관심을 끄는 이유다. 일본 월간 문예춘추는 작년 12월 호에 '미국은 이미 패배하고 있다'는 제목으로 토드의 인터뷰를 실었다. 눈썰미 있는 독자들은 간파했겠지만, 이 글은 매코널이 아메리칸 컨서버티브에 게재한 서평을 토대로 쓴 것이다. 서평을 통해 책을 먼저 접하는 건 게으른 접근이다. 그러나 서평자의 시선을 통해 미국 보수우파가 이 책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함께 볼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신자유주의 위기 드러낸 우크라 전쟁
매코널은 <서구의 패배>가 우크라 전쟁 이후 서구를 놀라게 한 세 가지 사실을 담고 있음에 주목했다. 우선 러시아 경제가 서방의 강력한 금융제재를 견뎌내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우크라에 대한 적절한 무기 공급에 실패함으로써 미국이 더 '민주주의의 무기고(arsenal of democracy)'가 아님이 여실히 드러났다는 점이다. 어떻게 러시아와 이란·북한 등 경제적으로 오합지졸에 불과한 나라의 무기 생산력이 그보다 경제력이 30배 정도 큰 집단 서방보다 나은 것일까. 토드가 지적한 대로 과연 신자유주의 세계의 정치경제학은 말짱 거짓이었을까.
세 번째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우크라 전쟁 이후 미국과 서구가 이데올로기적으로 고립되고 있는 이유다. 튀르키예와 인도를 비롯한 민주주의 주요 국가들을 대러 제재에 동참시키지 못한 것은 물론, 전쟁이 진행될수록 되레 러시아에 대한 글로벌 지지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의 대부분은 무관심하거나, 우크라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기지가 돼야 한다는 미국의 오랜 주장에 반대한다.
네오콘이 토드의 책에 갖는 관심은 기실 다른 데 있다. 프랑스 사회에 토드의 분석이 퍼뜨릴 '나쁜 영향력'에 대한 경계가 깔려 있다. "프랑스는 미국이나 영국보다 더 책에 영향을 받는다. 토드의 관점이 이미 프랑스 기성제도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라는 매코널의 진단이 이를 말해준다. 나토와 미국에 회의적인 '드골주의'의 부활을 걱정한다. 매코널의 걱정은 아직 기우에 머무른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프랑스 정부는 우크라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거두지 않고 있다.
미국 추종이 위험한 까닭
지난 2월 나온 매코널의 글을 새삼 소개하는 것은 네오콘의 세계관에 '구멍'을 낸 토드의 위력을 새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새 푸틴은 5선에 성공, 2030년까지 임기를 늘렸다. 우크라 전쟁은 러시아군이 방어에서 공격으로 나서지만, 아직 소강상태다. 또 집단 서방 또는 '서구 플러스'로 불리는 미국의 망토 안에는 대한민국도 포함된다. 스스로 방황하는 '허무의 제국'을 무작정 추종하는 게 위험하다는 토드의 경고는 한국에도 적용된다. 토드가 우크라 전쟁을 계기로 미국을 허무의 제국으로 분석했다면, 미국 언론인이자 정치학자인 파리드 자카리아는 가자지구에서 계속되는 민간인 학살극을 계기로 미국을 '자기 회의에 빠진 슈퍼파워'로 규정했다.
예지자는 어느 시대나 반대에 부딪힌다. 소련 해체 15년 전 이를 예측한 <최후의 추락> 역시 출간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르몽드는 "예지자는 아무리 예측이 위험할지언정 예지자일 뿐"이라면서 "토드가 프랑스에서 크렘린궁의 프로파간다를 중계하는 최초의 인물은 아니다"라고 비꼬았다. 르몽드가 혹평을 한 것은 러시아의 우크라 침공을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푸틴을 충분히 사갈시하지 않았다는 불만으로 읽힌다. 과학의 이름을 빈 낡은 분석이라고 험담하고, 우크라 전쟁에 관한 현장 연구를 인용하지 않았다는 트집도 잡았다.
토드는 프랑스 공산당원 출신이다. 그런 그가 소련의 몰락을 예견하자 '반공주의자'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러나 냉전 승리에 취한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간의 수렁에 빠지던 2001년 토드가 <제국 이후 : 미국 질서의 붕괴에 대한 소고>를 펴내자, 이번엔 '반미주의자'로 불리게 됐다. 예지의 신빙성은 사후에나 확인할 수 있다.
냉전ㆍ탈냉전ㆍ탈탈냉전 시대, 미국의 같은 실수
<최후의 추락>이 상당 부분 들어맞았듯이 <제국 이후>에서 토드의 논점 역시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의미를 갖는다. 토드는 "미국이 (탈냉전 시대) 제국이 된 것은 전략 덕분이 아니라 소련의 갑작스러운 붕괴로 어쩌다 된 것"이라면서 이후 미국은 빌려온 자본으로 사치스러운 소비에 탐닉하고 있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미국에 위협이 될 수 없는 북한과 쿠바, 이라크와 같은 '군사적 꼬마국가'에 적대감을 키웠다.
"세계는 1970년대 범했던 실수를 반복하려고 한다"라는 토드의 지적도 여전히 울림을 갖는다. 냉전시대 미국의 군사력 확대가 소련의 세력이 커지고 있기 때문으로 잘못 알았지만, 사실 소련의 위협은 줄어들고 있었다. 탈냉전 시대에는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며 보이지 않는 적과 전장없는 전쟁에 몰두했다. 미국의 군사주의는 지금도 유럽과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진행 중이다. 소련의 위협이 중국의 위협으로 대체됐을 뿐이다. <서구의 패배>가 10년쯤 뒤에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벌써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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