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 이 자리에 있는 철강과 알루미늄 노동자들은 미국의 척추다. 강력한 철강 및 알루미늄 산업은 미국 국가안보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이다." (트럼프, 2018년 3월 8일. 백악관 루즈벨트룸)
"중국 철강기업들은 이익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경쟁하는 게 아니라 속이고 있다. 우리는 여기, 미국에서 그 피해를 보아왔다." (바이든, 17일 피츠버그 전미철강노조 본부)
욕하면서 배우는 바이든
욕하면서 배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중국산 철강 및 알루미늄 제품에 대한 관세 25% 인상 발표는 6년 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발표를 연상시켰다. 트럼프는 캐나다와 멕시코를 제외한 외국산 철강·알루미늄 제품에 대한 관세 인상 결정을 담은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인상률은 철강 25%, 알루미늄 10%였다. 바이든은 취임 뒤 트럼프의 관세인상을 계승했다. 이번 인상은 트럼프의 인상안에 더해 추가로 인상한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트럼프는 중국을 겨냥하며 불특정 다수 국가들의 제품에도 같은 관세를 부과했지만, 바이든은 중국산 제품을 특정해 부과했다. 값싼 중국 제품과 경쟁하는 한국 철강기업에는 호재가 되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지극히 국내 정치적 목적에서 세계시장을 흔들어 놓은 점에서 '붕어빵'이다. 트럼프와 바이든이 제시한 근거 역시 같다. 미 대통령이 특정국이 교역 협정과 관행을 위반한다고 판단하면 관세 및 비관세 조치로 보복할 수 있도록 규정한 1974년 무역법 301조(슈퍼 301조)를 동원했다. 50년 전 대량생산시대의 법 조항을 들이민 것이다.
트럼프는 작업복 차림의 철강 및 알루미늄 노동자들을 병풍으로 세워 놓고, 행정명령안에 서명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2016년 대선 유세 때부터 중국을 겨냥한 보호무역적인 발언을 해왔던 그다. 바이든은 더 노골적이다. 펜실베이니아주의 '철강 도시' 피츠버그의 전미철강노조 본부를 방문한 자리에서 발표했다. 대표적인 '녹슨 공장 지대(Rust Belt)' 펜실베이니아는 위스콘신·애리조나·조지아·미시간·네바다·노스캐롤라이나와 함께 미국 대선의 향방이 걸린 7개 경합주에 속한다. 작년 8월 이후 각종 여론조사 결과 경합주 7곳에서 0 대 7로 밀리던 바이든이 0.5%포인트 안팎으로 트럼프에 잠깐 앞섰던 유일한 주였다. 그럼에도 30일 리얼클리어폴리틱스의 대선 여론조사 집계에서 트럼프는 바이든에 1.4%포인트 우세를 유지하고 있다.
바이든과 트럼프의 차이
트럼프와 바이든의 무역정책은 물론 결이 다르다. 트럼프는 무역 불균형과 관세에 초점을 두었던 반면에 바이든은 전략적·종합적 접근에 치중했다. 트럼프의 관세 인상은 각국의 보복조치와 수입 철강 제품을 사용하는 미국 기업의 비용 증가로 이어져 실질적으로 미국 경제에 마이너스 효과를 주었다. 2021년 1월 취임한 바이든 행정부의 무역정책은 두 갈래였다. 우선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인상 조치를 승계하는 한편, 전략적 검토를 추가했다. 전략적 검토는 단기적 무역 불균형뿐 아니라 장기적, 전략적 경쟁 측면에서 검토한다는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반도체와 통신 등 첨단기술과 국가안보에 초점을 두고 반도체과학법(CSA)과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비롯한 법령을 정비했다. 동시에 교역과 경제적 관행에 단호하게 대응하면서도 기후변화와 같은 글로벌 이슈에서는 협력을 추구했다. 트럼프가 동맹과 우방도 징벌적 관세 대상에 포함했지만, 바이든은 중국에 집중했다. 지정학적 분쟁을 조장하거나, 방치하는 동시에 IRA와 CSA 등을 통해 막대한 보조금을 미끼로 동맹과 우방국 기업의 미국 내 생산을 유도하는 큰 맥락에서 중국을 다루고 있다.
철강제품 관세 25% 인상이 기시감을 주지만 발표 이후 전개되는 양상은 사뭇 다르다. 트럼프의 관세 인상은 미·중 무역전쟁으로 비화했지만, 바이든의 인상 방침 발표는 '찻잔 속 태풍'에 머물러 있다. 중국의 대미 철강·알루미늄 수출 물량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해 중국의 철강수출 중 대미 수출은 59만 8000t으로 전체의 9%에 불과하다. 수출 총액 850억달러의 1%가 안 된다.(로이터 통신) 일본과 한국, 중동 국가들로의 수출이 주력이다. 중국 철강업계의 더 큰 고민은 국내 수요의 부진이다. 지난해 전년 대비 3.3%가 줄었고, '중국 야금 산업 계획·연구소(MPI)에 따르면 올해도 1.7% 줄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의 값싼 철강 제품은 미국뿐 아니라 인도와 멕시코, 태국, 브라질 등 다른 나라의 보복 조치에 직면해 있다. 인도는 반덤핑 관세를 매겼고, 멕시코는 관세 80%를 인상했다. 바이든의 이번 발표가 상징적인 조치로 해석되는 이유다.
관세는 양날의 칼이다. 트럼프의 관세 인상은 각국의 보복 조치와 수입 철강·알루미늄을 생산하는 미국 기업의 비용 증가와 수출 감소로 이어져 역효과를 낳았다. '녹슨 공장'은 다시 가동되지 않았다. 트럼프와 바이든이 잇달아 관세 인상 카드를 꺼내는 것은 정치적인 동기에서다. 그 필연적인 부산물은 단순히 관세 인상에 따른 업체별, 국가별 손익 비교라는 미시적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미국 경제부흥 위해 한 축 무너뜨린 세계화
탈냉전 시대 세계 경제를 떠받치던 두 개의 기둥은 자유무역과 세계화이다. 트럼프 첫 임기 4년이 '미국 퍼스트' 구호 아래 자유무역의 근간을 뒤흔든 시기라면, 바이든 4년은 더 큰 맥락에서 세계화의 한 축을 무너뜨린 시기였다. 중국산 저가의 생필품은 여전히 미국 월마트를 가득 메우고 있다. 그러나 반도체와 전기 배터리, 청정에너지 기술, 희귀광물의 공급망을 재편하는 바이든의 경제전략은 첨단기술 분야에서 세계화의 규칙을 깬 것이다. 대만 반도체 파운드리 업체 TSMC(台積電)의 창업자 모리스 창(92·張忠謀)이 작년 3월 16일 대만의 한 행사장에서 "세계화는 끝났다"라고 밝힌 이유다. 지정학적 갈등과 글로벌 공급망을 둘러싼 경제적 경쟁 탓에 세계경제가 높은 반도체 가격과 수급 불안정에 시달리게 됐기 때문이다.
자유무역과 세계화가 삶의 질과 일자리를 빼앗아 갔다는 미국 중산층의 박탈감은 기실 트럼프가 확산시킨 극우 포퓰리즘의 논리다. 분노와 증오는 그들의 표밭이다. 이를 비판해 온 민주당과 바이든 같은 전통적인 정치인도 트럼프의 극우 포퓰리즘 논리에 수렴하는 과정에 나온 게 4·17 관세 인상 방침 발표였다. 11월 대선 전까지 또 다른 대중국 보복 조치 또는 방침 발표가 나올 수 있다.
바이든은 한편으로 트럼프의 포퓰리즘 논리를 따라가면서 다른 한편, '전쟁 없는 전시경제'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대만전쟁의 위기를 한껏 고조시킨 뒤 한·미·일·대만의 칩(Chip)4 동맹을 결성하고 공급망의 안전을 명분으로 동맹과 우방의 주요 기업들이 미국에 공장과 연구시설을 짓도록 막대한 보조금을 풀고 있다. 삼성전자는 400억 달러(55조 원)의 대미 투자의 대가로 64억 달러(9조 원)의 보조금을 받는다. 전쟁 없는 전시경제는 우크라 전쟁에 이어 대만전쟁이 날지도 모르니 안전한 미국에 공장을 지으라는 논리다.
동전의 한 면이 지정학적 변화라면 다른 면은 국내 정치적 목표이다. 첨단산업을 부흥하는 한편, 미국 중산층에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겠다는 '중산층을 위한 외교정책'의 골간이다.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겠다는 발상이다. 지정학적 분쟁과 분쟁 가능성을 경제정책과 접목한 바이든 행정부에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가 경제전략의 사령탑이 된 이유다.
트럼프-바이든의 관세 정책이 '녹슨 공장'의 재가동으로 연결되지 못했듯이 IRA·CSA가 미국을 첨단 제조업 국가로 바꿔놓을지는 불확실하다. 기존 세계 경제질서가 흔들리고 있지만, 그 결과 미국 국내 정치적 목표가 달성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미국 대선이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내다보려면 전혀 새로운 변화보다 이미 변하는 추세에 집중하는 게 더 경제적이다.
더 궁금한 윤석열 정부 경제전략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전략적 좌표를 어떻게 설정하고, 어떻게 구현할지 고민하는 게 먼저라는 말이다. 문제는 대한민국이다. 윤석열 정부의 NSC는 한미 동맹과 한미일 군사협력의 중요성을 주로 강조할 뿐이다. 취임 2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경제전략이 안 보인다. 급변하는 환경에서 어떠한 비전도, 전략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기껏해야 대통령의 '소신'에 따라 방위산업 수출을 늘린다는 게 그나마 경제와 관련된 거의 유일한 목표다. 연구·개발(R&D) 예산을 깎았다가 내년엔 올리겠다는 오락가락 행보를 보인다. 경제적 관점에서도 미국 대선의 승자가 트럼프냐, 바이든이냐 따지기 전에 우선 윤석열 정부의 환골탈태에 더 관심을 두어야 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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