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방북이 임박했다는 신호가 나오고 있다. 4.10 총선 국면에 가렸지만, 한반도 주변에서 진행돼 온 굵직한 흐름이다. 지난 2년 동안 흔들렸던 '푸틴의 러시아'와 두 개의 코리아 간 관계가 변화의 문턱에 다가갔다. 조만간 이뤄질 푸틴 대통령의 방중이 방북으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에 따라 한러 관계가 파탄으로 가는 '진실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푸틴의 방중과 방북
러시아 외교부는 지난 9일 푸틴이 올해 중국을 국빈 방문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은 이날 베이징에서 왕이 중국 공산당 중앙외사판공실 주임 겸 외교부장과 회담을 했다.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예방했다. 러시아 외교부는 "시 주석은 라브로프 장관의 방문이 푸틴 대통령의 올해 중국 국빈방문을 위한 포괄적인 준비의 중요한 단계로 환영했다"고 밝혔다. 공식적으론 방문 시기를 '올해'로 넓게 잡았지만, 지난 달 푸틴의 방중을 처음 전한 로이터통신은 시기를 5월 중순으로 보도했다. 푸틴의 취임식(5월 7일) 뒤이자, 시 주석의 유럽 순방 전일 거라는 전망이다.
일정이 조정될 수 있지만, 지난해 9월 북러 정상회담과 두 번의 북러 외교장관 회담에서 방북의지를 거듭 확인한 푸틴이 올해 베이징을 거쳐 평양에 가는 건 바뀌지 않을 것으로 관측된다. 북러는 작년 7월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의 방북을 계기로 군사협력을 심화했고, 10월 방북한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교장관은 "러북이 새로운 전략관계에 완전히 도달했다"고 선언했다. 지난 3월 25~27일 세르게이 나리시킨 대외정보국(SVR) 국장이 방북, 정보 협력까지 시작했다. 정보 협력은 양국 관계가 높은 수준으로 격상됐음을 의미한다. 그동안 급진전된 전방위적 협력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푸틴의 방북은 한반도 주변 정세에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우크라 전쟁 이후 한국의 비우호적 행위가 쌓이면서 극동 러시아 개발의 파트너로 한국이 갖는 무게가 가벼워진 반면에 북한의 무게가 무거워졌다. 외적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이 출발점이었지만, 내적으로는 윤석열 정부의 대미 외길 외교가 진행된 기간에 벌어진 일이다. 푸틴은 첫 임기를 시작한 2000년 7월에 방북했다. 5번째 임기를 시작하면서 다시 평양을 찾으면 24년 만이다.
지난 20여년 간 러시아와 투 코리아의 관계는 대칭적이지 않았다. 무게추가 남한에 기울었었다. 윤석열 정부 이전까지 한국에 러시아 극동은 기회의 땅이자, 남북한 대치를 평화와 번영으로 유도할 고리였다. 푸틴이 2000년 취임 뒤 줄곧 남한을 파트너로 삼아 온 이유다. 러시아는 유엔 안보리를 중심으로 한반도 비핵화에 협조하면서 협력 파트너로 한국을 주시해왔다. 수많은 대북 제재 결의와 그 이행에 협력했다. 벌목과 건설 부문을 중심으로 많은 북한 노동자를 받아들였지만, 탈북자 문제 처리에도 한국에 협력했다. 적발 즉시 북한으로 송환하는 중국과 확연히 대비된 지점이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올해 들어 기존 협조 노선에서 잇달아 탈선했다.
러시아 한반도 정책 전환의 리트머스
우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탈북자 지원 활동을 해 온 한국인 선교사 백모씨가 지난 1월 초부터 간첩혐의로 구금됐음이 밝혀졌다. 러시아 정부가 지난 3월 11일 타스통신 보도를 통해 우회적으로 공표한 사실이다. 러시아는 2016년 북한과 '상호 불법체류자 송환협정'을 체결했지만, 이후에도 탈북자를 돕는 한국인을 체포하거나 처벌한 적이 없었다. (박병환 전 주러 공사) 3월 28일에는 유엔 안보리에서 대북제재위원회 전문가 패널의 임기 연장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2009년 북한의 2차 핵실험 뒤 안보리 결의 1874호로 창설된 전문가 패널은 4월 말로 종료된다.
마리아 자하로바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은 29일 "대북 제재가 지역 안보를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악화시켰다. 안보리는 더 이상 한반도 문제에 대한 낡은 틀을 이용할 수 없다"라며 거부권 행사 이유를 밝혔다. 한미와 서방은 경악했고 김성 주유엔 북한 대사는 러시아에 감사를 표했다.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가 남북한과 러시아. 3자 관계의 맥락에서만 나온 결정은 아니다. 작년 2월 러시아의 미러 신전략핵무기감축협정(START2) 무력화에서부터 최근 가자지구 휴전안에 이르기까지 주요 글로벌 이슈에서 미국과 러시아는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골이 깊어질대로 깊어졌다. 외교적 해결을 외면하고, 군사주의로 일관하고 있는 조 바이든 미 행정부에 최소한 절반의 책임이 있다. 그러나 한러 관계가 원만했다면 조정이 가능했던 사안이다.
러시아의 한반도 외교의 변화가 지극히 예측가능했었다는 점에서 윤석열 정부에 무거운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 '직무유기' 수준을 넘는다. 문제를 풀어가기는커녕 악화시키는 데 전념했다. 파국이 임박했음에도 오히려 대러 강경 조치에 가속도를 내 왔다.
한국인 선교사 구금, 북한제재위 패널 종료로 시그널
러시아 외교부가 "한반도 문제에서 러시아의 입장이 바뀔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은 이미 작년 4월부터다. 윤석열 대통령이 4.26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에 앞서 가진 로이터통신 인터뷰에서 '조건부 우크라 무기 지원' 방침을 밝힌 직후다. 안드레이 쿨릭 주한 러시아 대사는 <시민언론 민들레> 인터뷰에서 "한국이 우크라 '군사 스폰서 국가'에 합류한다면, 한반도 문제에서 러시아와 한국의 협력이 재검토대상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한국은 아직 대 우크라 무기 지원 금지선을 넘지 않았지만, 미국과 폴란드 등에 155㎜ 포탄을 우회수출해 왔다. 윤 대통령은 작년 7월 15일 키이우를 방문, 우크라의 승전을 노골적으로 기원했다. 극적인 변곡점은 작년 12월이었다.
푸틴이 4일 이도훈 주러 대사에 신임장을 주면서 "양국 국민에게 이익이 되는 파트너 관계로의 복귀"를 희망했지만, 이에 대한 한국의 답변은 같은 달 26일 대러시아 수출통제 품목을 682개 추가한다는 산업통상자원부의 발표였다. 웃는 낯에 침을 뱉은 격이었다. 러시아 외교부는 한국의 조치가 공식화되는 2월쯤 대응조치를 예고하면서 "러시아가 비대칭적인 대응을 하더라도 놀라지 말라"고 경고했다. 복기하면 한국인 선교사 구금과 대북제재위 전문가 패널 연장 거부권 행사가 취해진 시점과 일치한다. 두 가지 조치는 러시아가 한국의 주요한 정책에서 필수불가결한 협력 대상임을 새삼 일깨웠지만, 윤석열 정부의 폭주는 계속됐다.
러시아의 외교 스타일은 사사건건 한국에 위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중국이나, 돌이키기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 미국과 확연히 다르다. 대표적인 게 START2협정 무력화였다. 러시아는 협정의 핵심 요소인 미국의 러시아 핵시설 사찰을 허용하지 않는 조치에 그쳤지만, 협정 자체를 파기하지는 않았다. 협정은 2026년 5월까지 유효하다. 그전에 미국이 타협을 시도하면 바뀔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2018년 중거리핵전력(INF) 협정 만료를 1년 남기고 일방적으로 폐기한 것과는 결이 다르다.
비우호국 중 가장 우호적인 국가?
러시아는 한번 정한 레드라인 기준을 쉽게 바꾸지 않고, 타협의 여지를 남긴다. 분단과 동맹의 족쇄에 포획된 한국의 입장을 외면하지 않는다. 우크라 전쟁 뒤 미국이 주도한 대러 제재에 동참한 비우호국 49개국의 하나가 된 것 자체를 '잠정적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적어도 지난 1월까지는 그랬다.
게오르기 지노비예프 신임 주한 러시아 대사는 1월 19일 스푸트니크 통신 인터뷰에서 "한국이 (대 우크라 직접 무기 지원이라는) 레드라인을 넘지 않는 한 우리는 기꺼이 장래의 파트너로 생각할 의향이 있다"라면서 "한국이 다시 러시아에 우호적인 국가로 돌아오는 첫 번째 비우호국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우리 외교부 고위당국자도 그즈음 "한국이 취하는 대러 제재는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의 제재에 비해 정도가 심하지 않다. 러시아도 이를 인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한러 관계는 이후 더욱 악화됐다.
러시아는 대북제재에 일몰조항 포함할 것을 전제로 전문가 패널 임기 연장에 동의할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한국인 선교사 문제는 한러 간에 해결이 가능한 문제였다. 한국이 대러 외교력을 발휘한다면 접점을 찾을 수 있었던 이슈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되레 엇나갔다.
한국 외교부는 지난 2일 러시아 선박 2척과 북한 정보기술(IT) 노동자 송출에 관여한 러시아 기관 2곳과 개인 2명을 독자제재 대상에 포함시켰다. 자칫 러시아의 자존심과 감정을 덫드릴 비정치적인 조치도 남발하고 있다. 지난 달 '푸틴의 발레리나'로 불리는 스베틀라나 자하로바의 내한 공연을 취소한 데 이어 볼쇼이 발레단 의 갈라콘서트도 백지화했다. 오는 8월 부산 세계지질과학총회(IGC)에서 국제지질과학연맹(IUGS)이 러시아 학자들의 참가를 배제한 것도 악재다. 서방이 19세기에 유포했고, 우크라 전쟁을 계기로 확대재생산하고 있는 '루쏘포비아(러시아 혐오증)'가 21세기 한복판에 별로 관련이 없는 한국에서 만개하고 있다는 인상마저 준다.
대러 외교 외면해 온 '윤석열정부 NSC'
미러 무한대치가 계속되면서 한반도에서도 부정적 '거울효과'가 벌어졌다. 작년 4.26 한미 '워싱턴 선언' 뒤 7.27 북러 국방장관 회담이 열렸다. 8.18 한미일 캠프 데이비드 회의 뒤에는 9.13 북러 보스토치니 정상회담이 열렸다. 작년에 한미의 마파람이 거셌다면, 올해는 북러 된바람의 풍향이 심상치 않다.
미러 대치가 계속되는 한 한국의 활동공간은 넓지 않다. 그러나 충격을 최대한 완화하거나, 러시아의 보폭을 조정할 정도의 능력을 보유하고 있던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한국이 막후대화를 통해 협력 파트너로 복귀할 여지를 내보였다면, 북러 밀착의 속도와 성격이 달라질 수 있었다. 미러 사이에서 '새우등'이 터졌다기보다 자발적이고, 공격적으로 러시아를 배척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대통령의 귀를 잡고 있는 김태효 1차장의 국가안보실(NSC)이 주역이다. 4.10 총선 뒤 "대통령실 인적 쇄신에서 국가안보실(NSC)은 제외한다"는 대통령실의 발표가 새삼 절망적으로 다가오는 까닭이다. 한러 관계를 악화시키고도 그 후과에 지극히 태평한 NSC가 건재하는 한, 푸틴의 방북과 한러관계의 파탄은 불가피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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