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중은 지난 16일 베이징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양자 간 협력과, 다자 간, 지역 분쟁 현안에 대한 공동입장을 내놓았다. 러시아어로 7000단어인 공동성명을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일단 한반도와 세계의 안보 문제를 중심으로 접근해 본다. 상당 부분 이미 알려진 입장이지만, 한반도 주변 관련국이자, 세계 2, 3위 군사대국 정상 간 합의문을 허투루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반도 공동입장' 강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동북아시아 힘의 균형을 흔드는 세력으로 미국을 지목하고 군사력 구축과 군사적 블록 및 연합의 결성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러·중은 "미국과 동맹국들의 군사적 협박 탓에 한반도에서 군사적 사건(충돌) 및 확전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면서 미국은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고 대북 협박·제재·압력을 포기, 북한이 참가하는 협상 과정을 재개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면서 2017년 '한반도 문제에 관한 러·중 공동입장'을 거듭 확인했다. 공동입장은 북한의 핵 및 미사일 시험발사-한미의 대규모 합동훈련의 쌍중단과 북미·남북 관계 정상화를 위한 협상 개시, 안보리 대북 제재의 점진적 해제 등을 제안하고 있다. 러·중 정상은 그러나 당시와 달리 북한의 핵·미사일 시험을 위협의 원천으로 지목하지 않았다.
한반도는 지역 분쟁에 관한 입장을 담은 공동성명 10장에서 남중국해 분쟁에 이어 두 번째로 다뤘다. 미국이 제기하는 위협에 대한 러시아의 대응이 미국에 위협이 되고, 다시 러시아의 대응을 부르는 '무한 대치'의 강대국 정치의 연장선상에 한반도 문제가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러·중은 미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의 군사 구도 재편과 군사훈련을 모두 문제 삼았다. 미국이 한국, 일본, 필리핀 등과 맺고 있는 축·바큇살(Hub-Spike) 구조의 양자 동맹에 더해 한미일·미일호주·미일필리핀·미영호주(AUKUS) 등 격자형(lattice-like) 소그룹 군사협력체를 결성하는 것을 위협의 핵심으로 보았다. 성명은 "미국이 동북아에서 냉전 시대의 사고로 지역의 안보와 안정 위에 소규모 그룹의 안보를 둠으로써 지역 내 모든 국가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면서 이러한 행동을 포기하라고 경고했다. 이와 관련,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은 지난해 12월 28일 타스 통신 인터뷰에서 아프가니스탄과 한국, 대만을 올해 분쟁 우려 지역으로 꼽은 바 있다.
중거리 핵전력(INF) 균형 파괴
대만 문제는 분쟁지역으로 다루지 않은 채 러시아가 '하나의 중국' 원칙을 지지한다는 입장만 담았다. 러시아는 남중국해 갈등에서도 중국 입장을 지지한다고 명시했다. 10장의 총론은 지역 분쟁과 관련, 한 나라의 안보가 다른 나라의 안보에 영향을 미치면 안된다는 '불가분의 안보 원칙' 하에 유라시아 공간에 지속가능한 안보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 인도·태평양 전략이 이 지역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파괴적인 노선과 일치시키면서 지역 평화와 안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인식이다.
세계 차원에서 양국 정상은 핵무기 통제 체제가 무너진 가운데 미국이 중거리 핵전력(INF)을 강화하는 것에 주목했다. 국제 안보 문제를 다룬 공동성명 제7장은 공교롭게 우크라 전쟁 직전(2022.1.3.)에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자 공식 핵보유국 간에 합의했던 '5대 핵보유국 지도자들의 핵전쟁 및 군비경쟁 예방에 관한 공동성명'을 환기했다. "승자가 있을 수 없는 핵전쟁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라면서 핵무기의 전략적 균형이 무너지고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지구 최후의 날 시계(Doomsday Clock)는 자정(종말) 90초 전을 가리키고 있지만 미국과 중국, 러시아는 핵전력 경쟁을 가속화하고 있다.
러·중은 핵무기의 전략적 균형이 흔들리는 원인으로 "미국이 결정적인 군사적 이점을 확보하기 위해 글로벌 미사일 방어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지상 발사 중거리 핵전력(INF)을 유럽과 아시아에서 배치하고, 지역 동맹국에 이전하는 데 특별하고 매우 깊은 우려를 표한다"고 밝혔다. "미국이 동맹국과 연합연습을 한다는 구실 아래 펼치는 군사훈련은 명백하게 반러시아, 반중국 지향"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지난 2월 미국 정보공동체의 '2024 연례 위협 평가' 보고서가 중국과 러시아, 이란, 북한을 위협의 원천으로 지목한 것과 데칼코마니다.
우크라 전쟁, 시진핑 중재 모종의 합의?
작년 3월 22일 러·중 정상이 모스크바에서 채택한 공동성명의 제목은 '새 시대를 여는 협력의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관계 심화와 대화를 통한 우크라이나 위기 해결에 관한 공동성명'이었다. 올해는 '수교 75주년의 맥락에서 새 시대를 여는 협력의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관계 심화에 관한 공동성명'이다. '우크라 위기' 자리에 '수교 75주년'을 넣었다. 그만큼 우크라 전쟁에 대한 비중은 작아졌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공동성명 9장에서 중국이 우크라 문제에 객관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평가하는 데 그쳤다. 동시에 "우크라 위기의 지속가능한 해결을 위해서는 분쟁의 원인을 제거하고 불가분의 안보 원칙에 근거해 모든 국가의 안보적 우려를 감안해야 한다"는 원칙론을 담았다. 두 정상은 16일 정상회담 뒤 베이징 중난하이(中南海)의 시 주석 관저에서 심도 있는 비공개, 비공식 회담을 했다. 이 자리에서 중국의 역할과 관련, 모종의 합의에 접근한 것으로 관측된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17일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 기자회견에서 시 주석의 중재자 역할을 거듭 평가했다. 푸틴은 러시아군이 최근 우크라 하르키우 지방에서 맹공을 펼치는 이유에 대해서는 "우크라군이 러시아 접경지역 벨고로드 등의 민간인 주거지역에 포격을 계속하고 있어 '완충지대'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과 서방이 러시아를 배제한 채 다음 달 스위스에서 여는 우크라 평화회의에 대해서는 "(미국이) 되도록 많은 나라를 참가시켜 타결됐다고 선언한 뒤 러시아에 최후통첩을 하려 하겠지만, 그런 목표는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국은 초청받았지만, 아직 참가 여부를 밝히지 않고 있다.
푸틴 '깜짝 방북'은 없었다
우크라를 방문한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15일 "현재 32개국이 (우크라와) 안보협정 협상을 완료했거나 완료할 예정"이라면서 "향후 10년간 우크라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고 우크라가 침략을 막을 수 있는 미래 군대를 만들 수 있도록 할 것(연합뉴스)"이라고 말해 러·우 전쟁을 장기적으로 끌고 갈 것임을 분명히 했다.
푸틴은 러시아 언론 인터뷰에서 시 주석이 최근 프랑스 방문길에 제안한 파리 올림픽 기간 중 휴전 문제와 관련해 "올림픽 휴전도 중요하지만, 국제 스포츠 관계자들은 스포츠를 정치화해 올림픽 헌장을 위반하고 있다"라고 지적, 휴전 동의 여부를 밝히지 않았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이번 대회에 러시아와 벨라루스 선수들이 국가대표 자격으로 참가하는 걸 금지하고 있다.
한편 러·중은 공동성명에서 북극항로 활용과 북극권 선적, 러시아 극동 지방의 물류 개선을 언급하면서 북·중·러 3국이 두만강 하류에서 중국 선박의 항행에 대해 건설적인 의견 교환을 나눌 것이라고 명시했다. 푸틴은 당초 방중 뒤 곧바로 평양을 방문할 것으로 관측됐지만, 올해 중 다른 일정을 잡을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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