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동맹국들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상황을 자극해 분쟁 국면(hot phase)으로 끌고 가고 있다. 북한은 이들의 도발적인 행동이 상황이 분쟁 국면으로 갈 때까지 도발하고 악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행동이라면서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러시아는 미국과 위성국들이 한반도 불안을 악화하면서 정확히 그러한 계획을 갖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한반도 위기에 대한 러시아의 경고 수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한·러 간 고위급 대화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이 21일 공개적으로 내놓은 경고다.
라브로프 장관은 이날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열린 상하이협력기구(SCO) 외교장관 회의 뒤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미국과 위성 국가들이 한반도 불안을 유발하기 위해 도모하는 계획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라면서 이같이 말했다. 러시아 타스 통신이 타전한 내용이다.
러시아가 한미일이 한반도 인근에서 벌이는 대규모 군사훈련이 이 지역 안보의 위협으로 지목해 온 것은 처음이 아니다. 라브로프의 이번 발언은 한미일의 대규모 군사훈련이 단순히 북한 핵무기와 미사일을 겨냥한 방어적 성격의 훈련이 아니라 분쟁 국면으로 확대하려는 의도 아래 진행되고 있다는 경고이다. 한반도가 미·러 간 무력 대치의 소용돌이 속으로 더 깊숙이 빨려 들어가면서 의도적 무력 충돌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말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16일 베이징 정상회담 공동성명에서 "미국과 동맹국들의 군사적 협박 탓에 한반도에서 군사적 사건(충돌) 및 확전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면서 미국은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고 대북 협박, 제재, 압력을 포기, 북한이 참가하는 협상 과정을 재개할 것을 촉구한 바 있다. 공동성명 이후 러시아의 한반도 안보 위기 인식을 획기적으로 달리한다는 정황은 포착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같은 위기 인식을 놓고 나온 '표현의 차이'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한미, 한미일 합훈의 의도와 계획에 관한 언급은 중대한 변화다. SCO 누리집에는 22일 오전 현재 기자회견문이 공개되지 않고 있다.
러·중 공동성명은 동아시아에서 진행되는 미국의 군사구도 재편과 대규모 군사훈련이 동북아 안보 위협의 원천으로 지목했다. 미국이 한국, 일본, 필리핀 등과 맺고 있는 기존 축-바큇살(Hub-Spike) 구조의 양자 동맹에 더해 한미일, 미일호주, 미일필리핀, 호주영국미국(AUKUS) 등의 격자형(lattice-like) 소그룹 군사 협력체가 지역 안보를 흔들고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미국이 동맹과 강화하는 대규모 군사훈련이 일으킬 위험을 경고했다.
라브로프는 작년 12월 28일 타스 통신 인터뷰에서 올해 분쟁 우려 지역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이어 한반도와 대만을 꼽은 바 있다. 그는 지난 1월 26일 유엔 기자회견에서도 "미국과 한국, 일본이 대규모 군사훈련을 통해 북한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라면서 특히 "한국의 대북 발언이 갑자기 더 적대적으로 변했다"고 지적했다. 당시 임수석 외교부 대변인은 "우리의 대북 억제력 강화는 북한의 도발과 위협에 대응해 안보태세를 확고히 하고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당연한 조치'라며 라브로프의 발언을 반박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잇따른 한반도 위기 경고에도 한·러 간에는 어떠한 고위급 대화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작년 9월 북러 보스토치니 정상회담 이후 5개월 만에 안드레이 루덴코 러시아 외교 차관이 비공식 방한한 게 전부다. 그나마 "북한 정권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 선제 사용을 법제화한 비이성적 집단"이라는 대통령의 발언(1월 31일, 중앙통합방위회의) 탓에 의미가 퇴색했다.
러시아와 중국은 우크라이나 전쟁 전까지만 해도 북한의 핵, 미사일 시험과 한미의 대규모 군사훈련을 모두 위협으로 지목해 왔다. 북핵이 한미의 군사훈련을 야기하고, 한미 합훈이 다시 북핵의 강화를 야기하는 악순환 구조를 위협으로 인식한 것이다. 그러나 미·러, 미·중 간 갈등이 첨예화하면서 이중 한미, 한미일의 군사훈련만을 떼어내 위협의 원천으로 지목하고 있다. 그 차이는 단순히 우크라 전쟁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미·러, 미·중 간 핵 군비경쟁의 구도 악순환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나오는 안보 위협 인식의 변화다.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동시에 진행된 변화다. 2019년 이전 미·중·러의 공동 화두였던 '한반도 비핵화' 의제는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 들어가 사라진 상태다.
공동의 관심이 사라진 동아시아는 강대국 간 핵, 재래식 전력의 '무한 대치'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2019년 미·러 중거리핵전력(INF) 협정을 일방 철회한 미국은 이후 INF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동시에 동아시아에 INF 배치, 이전을 늘리고 있다. 중국은 핵탄두의 수를 늘리는 한편 남중국해와 대만 해협 주변에 강화되는 미국과 동맹의 군비확장에 맞대응하고 있다.
북한과 러시아는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지난 14일 네바다주 지하 핵실험장에서 32개월 만에 핵폭발이 없는 '임계점 이하' 핵실험을 한 데 대해 "위험천만한 행동"이라면서 강력한 경고를 내놓았다.
이처럼 위급한 상황에 '윤석열의 한국'은 미국, 일본과의 군사 협력 강화라는 외길을 고수하면서 러시아와 중국의 반발을 야기하고 있다. 그 결과 한·중, 한·러 관계는 최악의 국면에서 좀체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대러시아 제재에 동참한 것은 불가피한 선택인 측면이 있었다. 그나마 155㎜ 포탄을 미국, 폴란드를 우회해 우크라에 지원하는 데 그치면서 대우크라 살상무기 직접 지원의 금지선은 지키고 있다. 그러나 대통령의 작년 7월 리투아니아 빌뉴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의 참석에 이은 우크라이나 방문 길에 노골적으로 우크라의 승전을 기원하는 무리수를 둠으로써 한러 관계를 더 깊은 수렁에 빠뜨려 왔다. 특히 한러관계는 최악의 국면이다. 대통령은 키이우 방문 때 1991년 우크라 독립 당시의 영토 복원과 전쟁범죄 책임자(푸틴 대통령 등)에 대한 처벌 등을 담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 대통령의 '평화 공식'을 승인했다. 한국은 1, 2차 대러시아 수출통제 품목 확대에 그치지 않고 있다. 지난 3월엔 '푸틴의 발레리나'라고 불리는 스베틀라나 자하로바의 내한 공연을 취소하는 등 비정치적 부문에서까지 러시아의 정서적, 감정적 반발을 야기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9일 취임 2주년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러시아가) 우리와 좀 서로 다른 입장, 불편한 관계에 있지만 가급적 원만하게 관리해나갈 것"이라면서 처음으로 한·러 관계 복원 희망을 피력했다. 그러나 취임 이후 일관되게 쌓아 온 러시아에 대한 적대적 입장을 뒤집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정부 차원의 상황 인식이 여전히 제자리를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장호진 국가안보실장은 지난 4월 27일 KBS 대담에서 3중, 4중의 전제조건을 두면서 "우크라 전 뒤 한·러 관계 개선 가능성이 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일단 우크라전이 끝나야 하고, 국제정세 블록화의 가속화 또는 새로운 외생변수가 아주 심하게 생기지 않을 경우, 또 러시아가 공세적 대외정책을 계속 취하지 않으면을 전제로 말한 관계 개선의 잠재력이다. 현재로선 이중 어떤 것도 현실성이 없는 일들이다. 마지막으로 내건 조건은 사실상 한러관계 복원을 하지 않겠다는 말로 들린다. 그는 "(상황이)우크라전 이전으로 정상화되면"을 전제했다. 이는 크림반도를 포함한 1991년 우크라 국경 복원과 전범 처리 등을 담은 젤렌스키 평화공식을 말하는 것으로, 한러 관계가 복원될 일은 없을 거라는 말을 에둘러 한 셈이다. 푸틴은 조만간 평양을 방문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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