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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러 조약 후폭풍, 지금이야 말로 대러 적극적 외교 펼칠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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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러 정상이 군사-정치적 동맹 조약을 맺은 뒤 한미가 강한 우려를 표명하고 대응 조치에 나서면서 후폭풍이 계속되고 있다. 한국의 우크라이나 실상 무기 직접 지원 방침이 다시 한러 관계에 최대 현안으로 떠올랐다. 자칫 대응이 대응을 부르는 악순환이 시작될 조짐이다.

장호진 국가안보실장이 20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북러 포괄적 전략 동반자 조약'을 강력하게 규탄하는 정부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2024.6.20. [대통령실 사진기자단] 연합뉴스

장호진 국가안보실장은 20일 저녁 '북러 포괄적 전략 동반자 조약'을 규탄하면서 "우크라에 대한 무기 지원 문제를 재검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러시아가 설정한 한러 관계의 금지선(red line)을 넘을 수 있음을 경고한 것이다.

정부는 또 북러 간 무기 운송 및 유류 환적에 관련된 러시아와 북한, 제3국 선박, 기관, 개인을 독자 제재 대상으로 지정하고 대러 수출통제(상황허가) 품목을 243개 추가해 총 1402개로 확대했다. 지난 2월 361개를 확대한 뒤 6개월 만에 다시 추가한 것이다.

북한에 이어 베트남을 국빈방문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0일 하노이 회견에서 "한국이 살상 무기를 우크라 전투 구역에 보내는 것은 아주 큰 실수가 될 것"이라면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상응하는 결정을 내릴 것이고, 그것은 아마 한국 지도부가 달가워하지 않는 결정일 것"이라고 경고했다.

푸틴은 북러 간 새 조약에 관해 "(과거에 비해) 새로운 것은 없다"라면서도 비교 대상을 직전 조약인 2000년 친선협력조약이 아닌, 냉전 시대인 1961년 북러 우호조약을 들었다. "그때의 기존 조약(1961년)과 모든 것이 똑같다. 새로운 게 없다"는 것이다. 이어 "조약상 군사적 원조는 오직 침공, 군사적 공격이 있을 때 적용된다"면서 내가 알기로는 한국이 북한을 침공할 계획이 없으므로 우리(북러)의 이러한 분야의 협력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북러 간 새 조약은 상호 군사원조의 어떠한 전제조건도 없는 1961년 조약과 달리 유엔헌장 제51조와 북러 양국의 국내법 등을 전제조건으로 달았다.

북한에 이어 베트남을 국빈방문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일 하노이 오페라 하우스에서 양국 친선협회와 러시아 유학 출신 베트남인들을 상대로 연설을 하고 있다. 2024.6.20. UPI 연합뉴스

푸틴은 우크라 전쟁과 관련된 북한의 군사지원에 대해 "어떻게든 서로의 능력을 사용할 가능성과 관련, 우리는 누구에게도 (지원을) 요구하지 않았고, 아무도 우리에게 제안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그는 20일 북러 정상회담 뒤 공동언론회견에서 "서방이 우크라에 최근 무기를 공급, 러시아를 공격하라는 신호를 주고 있는 상황에서 새 조약에 따라 북한과 군사-기술 협력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말했었다.

푸틴이 북러 새 조약에 대한 평가가 평양 발언과 뉘앙스를 달리하는 것은 조약문 곳곳에 '회색지대'를 배치한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제4조의 '유사시 상호 군사지원' 조항은 한국의 북한 침략이라는 유사시 상황이 발생하지 않으면 걱정할 게 없다는 설명이나, 북러 간 군사-기술 협력 가능성을 열어둔 것을 경고의 근거로 삼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20일 저녁 국가안보회의(NSC) 상임위원회를 개최한 뒤 북러 새 조약에 엄중한 우려를 표하고 규탄하는 4개 항의 '정부 성명'을 발표했다. 장호진 실장이 발표한 정부 성명은 북러 군사협력 약속에 대해 "국제사회의 책임과 규범을 저버린 당사자들의 궤변이요 어불성설"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또 "러시아가 북한의 군사력 증강에 직, 간접적으로 도움을 두는 어떠한 협력도 유엔 안보리 결의 위반이며 국제사회의 감시와 제재 대상임을 강조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9일 평양 금수산 영빈관에서 북·러 '포괄적 전략 동반자 조약'에 조인한 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국빈 만찬장에서 연설문을 들고 서 있다. 2024.6.19. 로이터 연합뉴스

특히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대북 제재 결의안 채택을 주도했던 러시아가 스스로 이를 어기면서 우리 안보에 위해를 가하는 것은 한러 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짚었다. 문제는 마지막 4항이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한미 동맹의 확장억제력과 한미일 안보협력체계를 더욱 강화할 것"을 다짐했다. 러시아가 동북아 안보를 위협하는 원인으로 규정한 한미 동맹과 한미일 군사협력의 강도를 높이겠다는 말로 러시아의 또 다른 대응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미 강경 대응을 예고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소통 보좌관은 20일 온라인 브리핑에서 북러 새 조약이 △한반도 및 인도·태평양 지역의 평화 안보를 중시하는 모든 나라와 △안보리 결의를 준수해야 한다고 믿는 모든 나라 및 △우크라 지원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이들의 우려 사항임을 강조했다. "그 우려는 중국과도 공유될 것"이라고도 부연했다.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미국이 한반도 주변에서 전략무기를 포함해 벌이는 대규모 연합훈련을 위협으로 간주하는 중국이 공유할지는 미지수다.

커비 보좌관은 이어 "우리는 필요에 따라 인도·태평양 전역에서 (방위) 태세를 평가할 것"이라면서 위협과 도전에 대응할 수 있는 최선의 입지를 확보할 것을 분명히 했다. 커비는 이 자리에서 미사일 방어용 패트리엇 미사일과 나삼스 지대공 미사일을 우크라에 추가 공급할 것이라고 밝혔다.

러시아와 미국이 우크라 전쟁을 염두에 두고 한반도 안팎의 안보 구도를 설계해 온 추세를 강화할 것임을 분명히 한 셈이다. 미·러가 무한대치하는 국면에서 한국이 우크라에 살상 무기 공급을 결정한다면,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형국이 될 수밖에 없다. 강 건너 불이었던 우크라 전쟁을 발 등의 불로 바꾸겠다는 말과 다름없다. 북한이 정상회담 다음날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조약문 전문을 공개한 것과 달리 크렘린궁이 공개하지 않는 것은 러시아가 해석하는 각 조항의 의미를 모호하게 두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이 대목에 필요한 것은 한러 간의 대면 외교다.

우크라 전쟁의 직간접 교전국인 미·러 간에는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한 군사적 핫라인 외에 어떠한 대화 통로도 열려 있지 않다. 한러는 다르다.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러시아의 의도를 파악하는 게 먼저다. 그러나 정권 출범 이후 한·러 간 갈등을 해소하기는커녕 대러 비방으로 악재를 쌓아 온 윤석열 정부의 관성으로 미루어 큰 기대를 하기 어렵게 한다. 작년 9.13 북러 보스토치니 정상회담 결과를 대면 접촉으로 전달받은 것은 5개월이 된 지난 2월 내한한 안드레이 루덴코 러시아 외교부 차관과의 차관급 대화에서였다.

어떠한 공식 문서도 서명하지 않았던 작년 북러 정상회담과 달리 이번 회담에서는 '포괄적 전략 동반자 조약'은 물론 다른 분야의 합의문도 여럿 나왔다. 정부가 20일 성명으로 우리 안보에 위해를 가할 수있는 북러 새 조약에 대해 강력한 비난을 한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규탄이나 개탄은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 성명전을 이어가거나 우크라 무기지원 결정을 내리 전, 적극적인 대러 외교로 러시아의 정확한 의도부터 파악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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