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8일, 수미 테리는 한국의 외교정책을 주제로 의회 스태프(보좌관, 비서 등)들을 워싱턴의 한 레스토랑에 초청해 '해피 아워(Happy Hour)' 자리를 마련했다. 공식적으로 주미 한국 대사관이 후원했지만, 사실 국정원이 돈을 댄 행사였다. (테리와 20여 차례 만난) '요원3'을 포함한 국정원 직원들도 참석했다. 행사는 한국 측에 첩보 공작 관행에서 말하는 '식별-평가(spot-assess)' 기회를 제공했다. 의회 참석자들은 예티(Yeti) 텀블러와 한국 대사관 로고가 찍힌 팸플릿을 선물로 받았다. 테리는 의회 스태프들에게 국정원 초대 행사로, 국정원이 참석한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미연방검찰, 수미 테리 기소장 37항>
미국 연방 검찰이 16일 한국계 한반도 전문가 수미 테리(김수미·54, 뉴욕)를 전격 기소한 것은 한미 관계의 냉엄한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는 사건이다. 미 법무부 보도자료와 기소장에는 단언컨대 테리의 활동이 미국 안보를 위협했거나, 한미 관계에 악영향을 미친 행적이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역사적으로 한미동맹이 가장 굳건하다며 샴페인을 터뜨려 온 윤석열 정부의 잔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건 분명하다. 동시에 미국이라는 나라의 유전자(DNA)와 한미 관계의 본질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준다.
검사는 피고인의 죄상을 밝히는 데 전념하고, 변호인은 무죄임을 밝히는 게 일이다. 68개 항목으로 된 31쪽의 연방검찰 기소장은 기실 미연방정보국(FBI)이 작성한 동향 보고 내용이 대부분이다. 재판정에 제출할 기소장은 피고에 불리한 내용으로 채워지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도 마치 그가 스파이 활동을 방조한 것으로 묘사했다. 테리가 국정원에 새로 포섭할 '예비 정보원'을 접근할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과 '한국 대사관 관계자들'이 국정원 신분임을 밝히지 않았다는 데 초점이 놓였다. '식별-평가'는 정보기관이 새 정보원 후보에 접근, 자질을 평가하는 것을 말한다.
기소장 전체에서 FBI의 악의적 의도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 같은 전제가 객관적 사실이 되려면 국정원이 실제로 정보원으로 포섭, 활용했어야 한다. 기소장은 "테리가 FBI 요원에게 '식별-평가' 관행을 알고 있었고 국정원 요원3에게 의회 스태프 접근을 허용하는 게 '(양 떼 무리에) 늑대를 불러들이는 것'과 같음을 인정했다"고 기술하는 데 그쳤다. 기소장 자체가 스파이 혐의를 들지 않고 있음에도 첩보영화의 한 장면과 같은 묘사를 통해 부정적인 인상을 의도적으로 심었다.
워싱턴에 파견된 외교부나 국정원 직원이 당연히 접근해야 할 대상에 의회 스태프가 포함된다. 미 행정부 전·현직 당국자와, 싱크탱크 전문가도 마찬가지다. 의회 스태프가 접근해선 안 되는 금단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의회 스태프뿐 아니라 상원 외교위 전문위원과 상·하원 의원에게도 접근해야 한다. 의회민주주의가 정착된 미국에선 때에 따라 장·차관보다 의회 전문위원의 영향력이 더 크다. 싱크탱크 전문가가 의회 스태프를 소개했다면, 편의를 보아준 것에 불과하다. 중죄(felony)와는 거리가 멀다.
기소장은 여러 곳에서 "국정원 요원이 대사관 직원을 가장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식사 대금이 대사관 재원이 아니라, 국정원 재원이라는 점도 강조한다. 그러나 주한 미 대사관과 주미 한국 대사관에는 국정원이나 중앙정보국(CIA) 직원이 '외교관 신분'으로 근무하고 있다. 비밀 요원(black·블랙)과 달리 공개 요원(white·화이트)은 주재국 정보기관도 인지하고 있다. 통상 대사관에 상호 주재할 화이트 요원의 수까지 합의한다. 대사관의 다른 정부 부처 파견관도 '외교관' 신분으로 활동하며, 활동 자금은 대사관 계좌에서 지출된다. 이 점이 문제라면 역으로 주한 미 대사관에 근무하는 CIA 화이트 요원들도 만나는 한국민에게 "나는 외교관이 아니라, CIA 요원"이라고 소개해야 할 것이다. 이를 두고 "외교관 신분을 가장했다"라거나 "국정원 자금임을 숨겼다"고 기술한 것은 의도가 엿보이는 해석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국정원 요원들의 활동을 두둔하거나, 합리화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테리 사건을 둘러싸고, 한미 상호 간에 공개된 화이트 요원의 정상적인 활동을 무슨 큰 잘못인 듯 자책하는 태도는 자학적이라고 본다. 정권 별로 잘잘못을 따지는 대통령실과 국회의 대처도 꼴불견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혐의는 외국대리인등록법(FARA)에 따라 등록하지 않았다는, 행정적 과실에 그친다.
미 법무부의 17일 자 보도자료 역시 본 혐의(FARA 위반) 외에 각종 의혹을 추가하고 있다. 요약하면 △한국 관료들의 은밀한 지시를 받고 한국 정부의 정책 옹호 △비공개(non-public) 자료를 국정원에 제공 △한국 관료들에게 미 행정부 당국자 소개 △이러한 활동의 대가로 명품과 고급 식사, 3만 7000달러(약 5146만 원) 상당의 후원금을 테리가 관장하는 싱크탱크 계좌로 수령 등 크게 4가지다. 객관적으로 시비를 가리려면 '의도'와 '결과'를 한목에 봐야 한다.
미 의회가 1938년 입법한 FARA는 나치 독일의 선전선동에 대한 대응이 목적이었다. 외국 로비 자체를 막은 건 아니다. 재미 교포 중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리인'으로 등록하는 경우도 있다. 일단 등록하면 감시 대상이 되기에 등록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외국대리인에 등록을 해도 선물 금액의 제한은 없다. 금전적 보수는 문제시한다. 그런데 싱크탱크 후원금을 제외하고 테리가 받은 금전은 외교부 당국자가 한국 신문 기고를 요청하면서 제안한 '500달러(약 69만 원)가 전부다. 이 과정에서 주미 대사관의 편법적인 국정홍보가 드러난 점은 한국 정부가 부끄러워해야 할 대목이다. 그러나 돈의 성격은 원고료일 뿐이다. (기소장 50항) 테리는 2014년 6월에도 대사관의 외교부 직원 1로부터 의뢰를 받고 미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스에 '완전하고 자유로운 코리아'란 제목의 칼럼을 기고했다. 원고료는 언급되지 않았다. (기소장 13항)
FARA는 방첩법과 달리 적발, 처벌이 목적이 아니지만 활용하는 측의 의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번처럼 FBI나 연방검찰이 문제를 삼으려고 작정한다면 FARA를 근거로 내세울 수 있다. 테리의 의도와 결과가 너무도 평이하기 때문에 도대체 왜 미 법무부가 이를 악의적으로 홍보하는지 의아할 뿐이다.
'비공개' 자료 공개는 2022년 6월 17일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이 주최한 간담회에 전문가 5명 중 한 명으로 참석해 메모한 자료를 국정원 요원에게 넘긴 것을 말한다(기소장 32항). 전문가 대담에서 나온 말은 '비공개'가 맞다. 그러나 언론에 대해 요청하는 비보도(off-the-record)처럼 일종의 신사협정일 뿐 법적 준수 의무가 있는 건 아니다. 이걸 어겼다고 범법이 되거나,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본인의 평판에 누가 될 뿐이다. 또 전문가 대담은 정책 담당자들이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소집하는 것으로 국가기밀이나 중요한 정보를 공개하는 자리도 아니다.
테리가 여러 차례 받은 명품 가방과 옷은 여론의 관심을 불러일으킬지언정 '대가성'에 따라 판단할 사안이다. '기여'에 비해 선물이 과도한 점은 이번 사건이 당혹스러운 또 다른 이유인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테리가 기고한 한미 양국의 언론 기고의 내용은 △한일 화해를 환영하고 △한미 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북한의 위협을 소개하거나 △북한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미 전략자산의 배치 또는 핵협의그룹(NCG)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게 대부분이다.
미국 시각에서 한반도를 바라보는 전형적인 미국 전문가의 범주를 넘지 않는다. '의도'가 불순하지 않았으며, '결과'가 미국 또는 한국에 해를 끼치지 않았다는 말이다. 보수 정부일수록 대통령 이하 고위 관료들이 닥치고 미국을 추종하는 게 의무라고 여기는 대한민국은 미국에 위협이 아니다. 그 반대다. 미국 국익을 위해 미국이 펼치는 정책의 효과적인 '수단'을 자처해 왔다. 윤석열 정부도 예외가 아니다. 국가전복을 꾀하고 나치의 정책을 홍보했던 것과는 본질적으로 차원이 다르다는 말이다.
다인종 국가인 미국은 종종 이민자들의 모국에 대한 충성을 경계한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계 미국인을 죄다 잠재적 스파이로 몰아 집단 수용한 적도 있다. 가장 과감한 인종이 유대인이다. 대만과 중국에 이어 한국계 미국인도 모국 사랑이 남다른 건 맞다. 그러나 자기 전략이 없이 미국의 망토 안에서 충성을 다하는 한국 정부, 특히 윤석열 정부의 '의도'를 의심한다면 난센스가 아닐 수 없다. 이번 사건의 가장 당혹스러운 대목이다.
미 연방 검찰이 악의적으로 포장했지만, 미국 국익에 반하는 테리의 행적은 없다. 그런데도 주미 한국 대사관의 정상적 활용을 '공작'인 양 몰아가고 있다. 매우 심각한 사안이다. 용산 대통령실이 전 정부 탓이나 하면서 '내부 총질'을 할 때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른바 사상 최고의 관계를 구가하는 동맹국에 대한 '예의'는커녕 고려한 흔적조차 없다. 무슨 이런 동맹이 다 있나. 윤석열 정부는 무슨 이런 나라를 그리 끔찍하게 두둔하고 있나. ☞ '수미 테리 사건' 대통령실 "전 정부 탓" 본질 흐린다 ☞ 한미, '수미 테리 사건화' 덮을 시간 13개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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