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2004-04-05|02면 |45판 |종합 |컬럼,논단 |826자 |
"혹시 아까 북녘의 혈육을 만나면서 내가 뭘 실수한 것은 아닐까." 지난 2일 남측 행사 관계자의 경솔한 언동으로 9차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파행을 빚는 동안 가장 마음을 졸인 것은 정작 최대 피해자인 이산가족들이었다. 몇몇 가족은 이날 북측 김정숙 휴양소에서의 공동오찬이 끝날 무렵 북측 가족이 일어나 큰소리로 노래를 부를 때 동조하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된 것은 아닐까 걱정부터 앞세웠다. 이들의 자책은 다음날 아침 남측 행사 관계자의 실언으로 사태가 빚어졌다는 당국의 설명을 들을 때까지 계속됐다.문제의 발단은 단순했다. 남측 행사 관계자가 북측 관계자에게 허투루 농을 건넨 게 화근이 됐다. 금강산 바리봉 치마바위에 새겨진 '천출명장 김정일장군' 문구를 빗대 '천출(天出)'의 의미가 남에서는 '천출(賤出)'로 이해된다고 말한 것이다. 그 결과는 심각했다. 북측은 그날 오후 예정됐던 이산가족들의 삼일포 나들이 행사를 무산시켰다. "이러다가 얼굴 한번 더 못보고 헤어지는 건 아닌지." 곳곳에서 탄식이 터져나왔다. 상봉에 나선 남측 가족 중 많은 경우 혈육이 북에 있다는 사실이 연좌죄의 빌미가 되던 시절, 서둘러 사망신고를 해야 했다. 북측이 남측 당국의 공식사과를 받아들여 16시간의 행사파행은 끝났지만 조심에 조심을 거듭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시절의 기억이 다시 한번 이들의 가슴을 덮쳤다. 혹여 북녘의 피붙이에게 누가 될 만한 언행을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이산가족들의 자기단속은 기자의 눈에 또 다른 비극으로 비쳤다. 6.15공동선언으로 남북당국이 본격 교류를 시작한 지 4년. 남북관계는 여전히 갈 길이 멀어보였다. 김진호 정치부jh@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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