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리포트 김진호특파원
미국 퍼스트레이디 미셸 오바마가 백악관 남쪽의 잔디밭을 뒤엎은 건 지난해 3월. 백악관에서 포토맥 강으로 내려다보이는 풍경을 제공하던 그곳에 텃밭을 일궜다. 30평 남짓한 곳에 양상추, 로즈메리, 당근, 오이, 양파, 고구마, 케일 등 55종의 씨앗을 뿌렸다. ‘미셸의 텃밭’이 신년 첫 일요일(3일) 저녁, 미국민의 안방에 찾아왔다.
당대 최고의 미국 요리사들이 2인1조로 팀을 이뤄 맞대결을 벌이는 ‘아이언 셰프 아메리카(Iron Chef America)’의 신년 첫 시리즈에서다. 백악관 수석주방장인 필리핀계 크리스테타 커머포드와 워싱턴 인근의 저명한 재야 요리사 마리오 바탈리가 맞붙었다. 미셸의 텃밭에서 재배한 식재료가 들어가야 한다는 게 이날 게임의 법칙이었다.
10분쯤 간격으로 등장하는 중간광고에 짜증이 날 법도 했지만 꼬박 2시간 동안 네 코스의 음식과 디저트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미셸은 프로그램 초반 4명의 주방장에게 텃밭을 내주면서 “싱싱한 제철 채소를 먹자”는 제안을 했다. “식구들이 매우 좋아하는 고구마는 1~2개씩만 뽑아가라”는 당부를 곁들였다.
4명의 주방장이 모두 어깨 또는 가슴에 성조기를 단 것 역시 눈길을 끌었다. 추수감사절 즈음에 집단학살을 당하는 칠면조와 햄버거, 바비큐 외에 딱히 미국식 식단이 떠오르지 않던 차였다. 하지만 주방장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채소와 육류가 어우러진 메뉴를 내놓는 과정은 장관이었다.
2010년을 맞는 미국은 뒤숭숭하다. 테러에 대한 불안감과 미국인 10명 중 1명이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경제상황이 불안의 근원이다. 전쟁지역이 아닌 곳에 거주하는 사람이 80평생 동안 테러로 죽을 확률이 8만분의 1인 반면에 8명 중 1명이 교통사고로 죽을 수 있다는 통계적 진실(오하이오주립대 존 멀러 교수)은 늘 그렇듯이 막연한 불안감에 자리를 내준다.
밀레니엄 첫 10년의 경제적 수확 역시 참담했다. 미국은 1940년대 이후 처음으로 10년 단위 고용성장률이 제로(0)를 기록했으며, 2008년 가계소득이 물가상승률을 감안할 경우 99년보다 떨어졌다. 아직 통계가 완결되지 않았지만 경제위기의 몸살을 앓은 2009년에는 더 떨어졌음이 분명하다(워싱턴포스트).
‘미셸의 텃밭’은 걱정스러운 오늘을 사는 미국민들에게 작은 기쁨을 선사한다. 정치적 ‘생쇼’라고 하기엔 너무 길다. 지난 1년간 그랬듯이 앞으로도 워싱턴 지역 초등학생들과 함께 밭을 일굴 게 분명하다. 특유의 언변으로 백악관 입주권에 더해 노벨평화상까지 낚은 남편을 제치고 미셸이 최근 갤럽여론조사에서 ‘2009년의 정치적 승자 1위’로 꼽힌 비결일 수도 있다. 오바마가 약속한 ‘변화’가 구현될지는 두고 봐야 한다. 하지만 미셸이 30평 텃밭에서 일으키는 녹색혁명은 최소한 기름기와 소금기가 유난히 많은 미국식 식단의 한 귀퉁이를 무너뜨리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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