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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워싱턴리포트

‘식코’의 비극 겪어보니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7. 13.

워싱턴리포트 김진호 특파원

뜻밖의 사고를 통해 미국 의료제도의 실상을 체험했다. 아내와 어린 딸이 워싱턴 시내의 한 공공도서관을 다녀오다가 사고를 당한 건 지난 1월. 지름 70㎝의 거목이 부러져 아침 나절 거리를 걷던 모녀를 덮쳤다. 구름 한 점 없는 평온한 날씨였다. 곧바로 경찰과 911구급차가 인근 조지 워싱턴대 병원으로 옮겨서 응급치료를 받게 했다. 천우신조로 딸아이는 가벼운 찰과상에 그쳤지만, 처는 머리에만 15바늘을 꿰매는 중상을 입고 1박2일 치료를 받았다.

퇴원 1~2주 뒤부터 우편함에는 치료비 청구서가 쌓이기 시작했다. 시장경제가 발달할수록 하나의 경제활동에 달라붙는 업자들이 많아진다. 응급실 업무를 잘게 썰어 대행하고 있는 3~4개의 외주업체들이 각각 비용을 청구한다. 총 치료비용을 가늠하게 된 것은 사고 발생 후 석달여가 지나서다. 10여종의 고지서를 통합, 계산해보니 2만2061달러(약 2200만원)나 되었다. 입원비와 외과수술, 몇장의 X레이 및 CT 촬영, 투약 등의 명목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레졸루션(resolution)’이라고 불리는 해결사 업체들에서 우편물을 보내왔다. ‘30일 내 응답을 하지 않으면 관계당국에 고발한다’는 최후통첩이었다. 변호사 도움 없이는 그많은 ‘채권자’들에게 일일이 사정을 설명하고, 굼뜨기 짝이 없는 시정부를 상대하는 게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이해할 수 없는 건 워싱턴 시당국이다. 코네티컷 애비뉴는 한산한 주택가가 아니다. 적지 않은 차량과 행인이 오가는 중심지다. 그럼에도 관리책임을 방기한 시정부에선 단 한 통의 위로 전화가 없었다. ‘증거’를 인멸하는 데는 신속했다. 사고 당일 오후에 문제의 가로수를 잘라냈다. 잘린 밑동을 보니 80% 이상이 벌레에 먹혀 있었다. 두 달쯤 뒤에 다시 현장을 지나다보니 아예 뿌리까지 파내고 새롭게 단장했다. 능란한 시장(市場)과 무능한 정부가 만났을 때 벌어지는 최악의 조합을 체험한 셈이다.

평범한 미국인들에게 100달러짜리 지폐는 거액이다. 신용카드 사용이 일상화된 이유도 있지만 쉽게 지출할 수 있는 ‘단돈 100달러’가 아니어서다. 의료비 부담이 미국인 파산의 가장 큰 원인인 까닭이다. 최근 쌍둥이를 제왕절개 수술로 낳은 한 교민은 “의료보험이 없었다면 1억원의 병원비를 부담할 뻔했다”며 혀를 내둘렀다. 미국 내 의료보험 무가입자와 사실상 혜택이 없는 낮은 수준의 가입자만 7500만명에 달한다. 이들 중 그나마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값싼 병원을 찾아 멕시코와 태국, 뉴질랜드 등을 떠도는 ‘의료 난민’으로 전락했다. 심장바이패스 수술의 경우 미국에서는 평균 치료비가 6150만원인데, 이들 나라에서는 동반가족의 항공·호텔비를 포함해도 절반이 안된다고 한다.

미국은 세계 어디에 내놔도 자랑스러운 점이 많은 나라다. 특히 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만끽할 수 있는 양질의 공공도서관 및 사회체육시설은 부러움의 대상이다. 하지만 행여 미국 의료서비스 제도를 부러워 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국가가 의료서비스를 또 하나의 상품으로 시장에 던져놓았을 때 벌어지는 지옥도가 평범한 미국 서민들에게는 일상이 된 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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