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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워싱턴리포트

파리 소매치기, 워싱턴 권총강도

by gino's 2008. 8. 24.

김진호 특파원

 

흑인 청년의 눈빛은 강렬했다. 혼다 시빅 승용차에서 내린 그는 권총을 꺼내 겨누면서 돈을 내놓으라고 했다. 화창한 휴일 아침, 워싱턴 북서부의 집 앞에서 지난주 당한 일이다. 매일 총기사건이 발생한다는 워싱턴이지만, 밤 10시 넘어서도 젊은 여성들이 혼자 조깅을 즐길 만큼 치안이 안전한 주택가다. 다행히 지갑에 갖고 있던 80여달러의 현찰을 건네주고 상황이 종료됐지만 실제 상황의 충격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사고 현장에 세워놓았던 자동차에 타고 있던 아이들과 친지의 노모를 생각하면, 지금도 식은땀이 난다. 불황이 심화되면서 워싱턴 일원에서는 요즘 총기를 동원한 강력 사건이 더욱 빈발하고 있다.

파리 오페라 지하철역에서 7호선 열차에 한 발을 들여놓는 순간, 2m가 넘는 거구의 청년이 내게 몸을 기대왔다. 소매치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청년의 허리띠를 움켜쥐었다. 청년은 “발이 저려서 그랬다”고 사과하면서도 능글맞게 웃어댔다. 순간 “소매치기에게 저항하면 반드시 해코지를 당한다”는 서울 거리의 상식이 떠올랐다. 얼떨결에 허리띠를 쥔 손을 풀었고, 바로 지하철 차량의 문이 자동으로 닫혔다. 창 밖의 청년은 보란 듯이 나의 지갑을 흔들며 유유히 사라졌다. 8년 전, 파리 연수 시절 당한 사건이다.


미국 테네시주 내슈빌 썬트러스트뱅크에서 산타복장을 한 은행강도의 모습 (출처: 경향DB)


개인적으로 겪은 사건은 두 사회를 비교하는 계기가 됐다. 파리 경시청을 찾아가 사건 진술을 하는 과정에서 파리의 소매치기는 총이나 칼 등 흉기를 갖고 다니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경찰관은 “왜 잡은 범인을 놓아주었느냐”면서 되레 안타까워했다. 반대로 워싱턴 경찰은 “범인의 요구에 절대 복종하기를 정말 잘했다”고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권총강도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말고, 요구하는 모든 것을 내주라는 게 워싱턴 거리의 상식이다.

프랑스 역시 치안 강화를 공약으로 내세운 니콜라 사르코지의 우파 정권이 집권한 것을 보면 거리의 안전이 당시에 비해 흔들리고 있는 건 분명하다. 저소득층의 살림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불법 이민자가 많은 세계화 시대의 공통된 현상이다. 하지만 강력 범죄의 발생 건수는 미국에 비해 여전히 적다. 파리의 소매치기가 흉기를 소지하지 않는 이유는 실직자, 불법체류자일지라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킬 정도로 도와주는 복지시스템이 미국보다는 자리가 잡혀있어서다. 인간을 극단으로 몰아가지 않는 사회 분위기가 총과 칼로 사람을 해하지 않는 풍토를 조성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범죄를 개인의 책임만으로 여기는 사회와, 국가가 책임을 분담하는 사회의 차이다.

워싱턴의 권총강도는 사건 당일 새벽 훔친 차로 시내 일원을 돌면서 하루 동안 5건의 강도 행각을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아직 잡히지 않았다.

사건의 충격이 가시면서 엉뚱하게도 그 청년이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용카드 사용이 일상화된 미국에서는 아무리 총을 들이대도 강탈할 수 있는 현찰이 수십달러에 불과하다. 그 적은 돈에 자신과 타인의 인생을 건 셈이다. ‘서울시 종로구 청와대로 1번지’에서부터 오른쪽으로만 질주하는 서울 거리의 요즘 치안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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