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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여적

한국의 뿌리

by gino's 2012. 5. 14.

김진호 논설위원


 


1973년 어느 날 생후 3~4일밖에 안된 여자아기가 서울의 한 거리에서 발견됐다. 고아원에 맡겨진 아기는 6개월 뒤 프랑스인 부부에게 입양됐다. 마흔을 앞둔 그의 이름은 플뢰르 펠르랭. 무탈하게 자라 지난 6일 프랑스 대선에서 승리한 프랑수아 올랑드 당선자의 핵심 보좌관 역할을 했다. 


한국 언론은 그가 새 정부에서 입각이 유력시된다는 소식을 거의 빼놓지 않고 전했다. 또 다른 입양아 출신인 장 뱅상 플라세 프랑스 녹색당 당수가 지난해 상원의원이 됐을 때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졌다. 입양아 출신의 성공사례는 은연중에 한국인의 핏줄이 강조되면서 대부분 흐뭇한 미담으로 전해진다. 한꺼풀 뒤집어 보면 지독한 위선(僞善)이 아닐 수 없다.

 

'태권도 배우기 한마당 행사'에서 고국을 찾은 해외입양아들이 수박을 격파해보고있다 ㅣ 출처:경향DB



입양아들의 반응이 궁금해 프랑스 파리의 한국인 입양자 단체인 ‘한국의 뿌리들(Racines coreennes)’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다. 아, 그들은 여전히 상처받은 영혼을 위무하고 있었다. 펠르랭·플라세의 성공담 따위는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다음달 말 1박2일로 여는 ‘파리에서 모이기’ 행사 안내가 소개돼 있었다. 그들은 전 세계 한국인 입양아 출신 성인을 18만명으로 추산했다. 올해는 그 중 14개국 250여명이 파리에 모여 서로의 경험과 아픔을 나누는 자리란다. “콤플렉스와 두려움을 덜고, 침묵과 오해가 종종 야기하는 무거운 결과를 대화로 피하자”는 글이 눈에 박혔다. 


이국인 부모에게 학대를 받거나 심각한 정체성 혼란을 겪는 입양아들의 아픔은 1991년 장길수 감독의 영화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으로 그 일단이 알려졌다. 지금은 어떨까. 보건복지부가 오늘 ‘입양인의 날’을 맞아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2464명의 입양아 가운데 916명이 해외로 보내졌다. 미국에서는 지난해 중국·에티오피아·러시아에 이어 4위를 기록했다. 과거엔 가난과 궁핍이 입양의 주된 동기였다면, 이제는 국내 입양의 93.8%, 해외 입양의 88.4%가 미혼모의 아기들이다. 


더 부끄러운 것은 전체 275명의 장애아기 중 76%가 해외로 보내졌다는 점이다. 언젠가 장애를 딛고 성공한 해외 입양아의 성공담이 또다시 언론에 대서특필될 판이다. 길에 버려져 낯선 땅으로 이식된 99%의 아기들을 보듬지도 못한 주제에, 성공한 1%의 핏줄 자랑만 늘어놓는 풍경은 욕지기가 치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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