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판처럼 슬로건이 요긴한 곳도 드물다. 1956년 정·부통령 선거 당시 민주당과 자유당이 장군멍군식으로 주고받은 ‘못살겠다 갈아보자’와 ‘구관이 명관이다’는 슬로건 명대결로 꼽힌다. 인터넷 시대를 거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주역으로 등장한 21세기 선거판에서도 장황한 공약 설명이나 “조국과 민족”을 운운하는 거창한 연설보다 정곡을 찌르는 슬로건의 위력은 여전하다.
미국 대선에서는 1992년 빌 클린턴이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슬로건으로, 로널드 레이건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1980년), ‘미국에 다시 아침을’(1984년) 등 ‘다시(Again)’ 슬로건으로 재미를 톡톡히 봤다. 4년 전 버락 오바마가 내걸었던 ‘우리가 믿는, 변화’나 ‘그래, 우린 할 수 있어’ 역시 신선한 돌풍을 일으켰다.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의 한 지지자가 피킷을 들어보이고 있다. (경향신문DB)
올해 우리나라보다 한 달 앞서 대선을 치르는 미국에서는 요즘 슬로건이 실종됐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면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오바마의 선거구호들이 들불처럼 번졌던 2008년 대선과 확연히 대비된다. 재선에 나선 오바마의 공식 슬로건은 ‘앞으로(Forward)’이고, 이에 맞선 미트 롬니 공화당 후보는 ‘미국에 대한 믿음’이다. 하지만 이를 알고 있는 유권자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한다. 조 바이든 부통령의 ‘빈 라덴은 죽었고, GM은 살아있다’는 지원 구호와 롬니의 비공식 구호인 ‘오바마로는 안 통해(Obama isn’t working)’가 상대적으로 더 먹히지만 이 역시 판을 흔들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한국 대선이건, 미국 대선이건 기성 정권의 실정(失政)에 대한 유권자들의 분노와 실망이 누적되어 누군가 터뜨려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상황에서 명구호가 나왔다. 올 미국 대선이 싱거워진 것은 오바마가 약속했던 변화에 대한 기대가 시들고, 그렇다고 구원투수를 자처한 롬니 역시 미덥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결국 기발한 슬로건은 시대상황이 만든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실망지수가 4년 전 미련없이 조지 W 부시를 떠나보냈던 미국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건만, 아직까지 한국 선거판은 썰렁하기 그지없다. ‘종북 딱지’의 망령이 현 정부의 숱한 실정을 집요하게 흐리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올해 대선판을 일거에 달굴 명슬로건이 나올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