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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장례

칼럼/여적

by gino's 2012. 6. 12.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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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논설위원

 

 

2002년 6월13일 경기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56번 지방도로 갓길을 걷던 14세 소녀 두 명이 숨졌다. 생일을 맞은 친구 집을 가던 효순·미선이. 훈련 중이던 미군 장갑차의 무한궤도에 말려들어갔다. 어른 아이 가릴 것 없이 “대~한민국”을 외치면서 월드컵 16강의 꿈★을 꾸던 나날이었다.

 

세간의 무관심 속에 인근 의정부여고 학생들이 하나 둘 촛불을 들고 나와 두 소녀의 넋을 기렸다. 촛불은 그리 시작됐다. 어른들은 월드컵 열풍이 한반도 남녘을 훑고 지나간 다음달 말에나 효순·미선이의 죽음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효촌리의 촛불은 서울 광화문, 시청앞 광장으로 옮아붙었고 수만, 수십만개로 늘어났다. 불평등한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에 대한 분노의 함성이 커졌다.

 

미국은 당황했다. 당시 주한미군 2사단장이던 러셀 아너레이 예비역 중장은 2009년 회고록 <생존>에서 “깊이 사죄하는 모습부터 보여야 하는 한국문화에서 사건 초기 정황 설명에 연연해 역풍을 초래했다”고 후회했다. 미국은 이후 진보적인 시민단체 지도자들을 초청, 장기연수의 기회를 제공하는 등 대중외교를 강화했다. 한국의 젊은 세대가 이전 세대와 다르다는 사실도 깨닫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너레이가 자서전에서 “한국 정치인들은 사건을 반미와 북한 비위 맞추기에 이용했다”고 쓴 것을 보면 여전히 반쪽의 한국 인식이다.

 

미선이 효순이 사망 10년 l 출처:경향DB

 

물론 사람이 모이다 보니 정치가 틈입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 해 대선 결과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반세기가 넘은 미군의 주둔 과정에서 수많은 한국인들이 억울하게 죽고, 다치고, 차별당하면서 켜켜이 쌓인 한(恨)을 미국은 보지 못했다. 그때마다 미국 역성을 들었던 한국의 국가권력 및 기득권 계층에 대한 불만 역시 읽지 못했다. 그 많은 거대담론들을 남기고 두 소녀가 우리 곁을 떠난 지 10년이 됐다.

 

‘소녀의 꿈’이라고 명명된 추모조형물이나 추모공원을 만들자는 논의가 오간다고 한다. 이런저런 추모행사도 열렸다. 하지만 “이제는 조용히 개인적으로 추모하고 싶다”는 유족들의 소망이 그 어떤 담론보다 크게 들린다. 그들이 남긴 화두는 오롯이 간직하되, 그들의 영혼은 가족의 가슴속에서 쉬게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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