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1-08-07 21:14:10ㅣ
“미국 전역에서 노동자들도 가족을 부양하고, 한쪽 부모의 수입만으로 자녀들을 대학에 보낼 수 있었던 시절. 주 5일, 하루 8시간 일하고 주말을 통째로 쉬던 시절이 있었다는데….”
미국 국가신용등급이 사상 처음 트리플A의 지위를 상실한 지난 5일, 다큐멘터리 감독 마이클 무어는 e메일 서신에서 생뚱맞게 ‘좋았던 옛날’ 타령을 했다. 30대 이하의 젊은이들이 종종 자신에게 “도대체 미국이 언제부터 추락하기 시작한 것이냐. 언제 그러한 좋은 시절이 끝났느냐”는 질문을 던지면서 덧붙이는 말이라는 것이다. 무어는 그날, 즉 미국 중산층이 몰락하기 시작한 날을 30년 전 8월5일로 꼽았다.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가 항공관제사들의 파업을 전원해고라는 극약처방으로 종결시킨 날이다. 불과 이틀 동안 파업을 벌인 끝에 관제사 노조는 깨졌다. 미국의 노동자 중산층이 ‘순응하는 다수’로 시나브로 전락하는 출발점이 됐다는 게 무어의 해석이다. 세계화의 연대기가 팡파르를 울린 순간이기도 했다.
2008년 월스트리트발 금융위기가 발생한 지 3년, 세계경제에 다시 먹구름이 끼고 있다. 미국 정치권의 국가부채 한도 증액협상 타결을 전후한 1주일간 미국과 유럽의 경제불안으로 전 세계 증시에서는 2조5000억달러가 증발했다. 한국 증시에서만 나흘 동안 129조원이 사라졌다. 미국의 동향에 전 세계 보통사람들의 꿈이 깨지는 현상이 재연되고 있는 것이다. 오바마가 미국 정치에 몰고 온, 또는 몰고 올 것으로 기대됐던 변화의 바람은 2008년 미국 대선 무렵에만 반짝했다.
사상 첫 흑인대통령인 오바마를 두고 ‘검은 루스벨트’라고 불렀던 까닭은 1930년대 대공황의 늪에서 미국경제를 건져 올린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역할을 기대했기 때문일 게다. 하지만 취임 3년차 오바마는 ‘검은 부시’에 가까워지고 있다.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의 부자감세안을 연장하는가 하면, 천문학적인 공적자금을 투입해 월가의 금융공학자들을 회생시켰을 뿐 아니라 어정쩡한 경기부양책으로 별다른 유효수요를 창출해내지 못했다.
적어도 월가에선 돈을 잃은 사람이 적다. 금융업체 경영자들은 다시 연말보너스로 돈벼락을 맞고 있다. 신용평가사들은 여전히 심판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서브프라임모기지 상품들에 트리플A를 부여했던 과거의 실책을 시치미 떼고 미국 국가신용등급을 떨어뜨린 스탠더드앤드푸어스가 그 대표격이다. 보통사람들은 대부분 잃었다. 미국 농무부 발표에 따르면 올해 들어 전체 인구의 15%에 달하는 4600만명의 미국인이 정부가 나눠주는 식료품구입권(푸드스탬프)으로 배를 채우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를 자초한 장본인들이 월가의 살찐 고양이들이라면 이번 파국의 주역들은 워싱턴 미국 연방의사당에서 옥신각신했던 정치권이다. 체감 절망지수는 절대비교가 어렵겠지만 적어도 개선에 대한 희망은 더 줄어들었다. 오바마 행정부는 그동안 케인스의 가르침대로 대규모 경기부양예산을 편성하는 한편, 인위적으로 돈을 시중에 푸는 양적완화정책을 동시에 폈다. 하지만 금융시장의 실패는 국가재정의 실패로 이어져 다시 시장을 뒤집어놓는 악순환 고리가 됐다. 프랭클린의 시대 처럼 미국민이 한뜻으로 뭉치기는커녕 여전히 티파티를 중심으로 보수우파의 작은 정부론이 끊임없이 발목을 잡은 탓이다.
이 모든 사실은 미국이라는 세계화의 신경절이 감염됐음을 말한다. 레이건이 길을 닦고, 빌 클린턴이 확장했던 세계화의 대로가 막다른 골목에 도달한 게 처음은 아니다. 문제는 더 이상 거품을 만들 거리가 없다는 점이다. 1990년대 말에는 실체 이상으로 부풀려졌던 정보기술(IT)산업이, 이후에는 미국인들에게 ‘부자아빠’의 헛바람을 불어넣었던 부동산 거품이 꺼졌다.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 “이노베이션(innovation)”이라고 치켜세웠던 월가 파생금융상품의 폭탄돌리기 잔치도 끝났다. 그동안 소비자들을 현혹시켜왔던 거품 거리를 더는 기대 하지 않는 게 좋을 듯싶다.
‘돈 놓고 돈 먹던’ 금융의 시대가 저무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대표적인 세계화 예찬론자였던 토머스 프리드먼은 이제 정부가 나서 보통사람들의 부채탕감을 도와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무어는 트위터나 온라인 청원에 매달리느니 컴퓨터를 끄라고 권한다. 거리로 뛰쳐나오거나 정치에 참여하라는 말이다. 그 첫번째 과제는 다시 올리브 나무를 심는 것일 게다. 수십년도 안돼 고철 덩어리로 변하는 렉서스 따위가 어떻게 수백년 동안 지속가능한 올리브보다 낫겠는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3년은, 그게 낫다고 생각했던 세계화의 장례기간이었다고 치부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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