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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아침을 열며

오바마의 몰락

by gino's 2011. 10. 24.
영하 5도의 차가운 날씨도 워싱턴 내셔널 몰을 가득 채운 열기를 식히진 못했다. 미국 전역에서 몰려든 200만명의 인파는 동틀 무렵부터 의사당 언덕을 향해 더딘 걸음을 시작했다. 펜실베이니아 대로를 비롯해 거리 곳곳에서는 ‘검은 대통령’의 탄생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었다. 2009년 1월20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 날 풍경이다. 

‘변화’와 ‘희망’을 내걸고 대권에 도전했던 오바마의 대통령선거 유세는 한 편의 장엄한 다큐멘터리였다. 무더기 표의 블루오션은 곳곳에 있었다. 정치 무관심층이었던 청년들이나 역시 주류정치와 선을 그었던 무당파 및 이민자들도 오바마가 대선에서 얻은 6945만표에 한 표를 던졌다. 오바마는 선거운동도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걸 여실히 증명했다. 
 
기실 보건의료개혁에서 대외정책까지 오바마의 대선공약은 2004년 대선 당시 존 케리 민주당 후보나 당내 라이벌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의 공약과 어슷비슷했다. 그럼에도 오바마가 말하면 다르게 들렸다. 공약 자체보다는 오바마의 뛰어난 웅변과 독특한 배경이 그를 권좌에 올려놓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러나 취임 3년도 안돼 오바마의 마술은 곳곳에서 풀리고 있다. 

취임 직후 80%를 넘나들었던 국정수행 지지율은 반토막이 났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회심의 카드로 내민 미국일자리법안은 별다른 호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지난주 일자리법안 홍보 겸 대선 유세를 위해 나선 버지니아주 투어 도중에는 트럭을 도난당하는 해프닝까지 겪었다. 명연설의 숨은 비결인 텔레프롬프터와 오디오 장비를 함께 잃었다. 리치먼드 교외의 한 소방서에서 “일자리법안이 통과되면 경찰관과 소방관의 해고를 막을 수 있다”고 기염을 토했지만 고작 2명이 박수를 치는 망신도 당했다. 오바마는 “박수를 쳐도 된다. 어서”라고 채근까지 해야 했다. 대중적 인기가 높은 부인 미셸을 대동하고 나선 버스투어였다. “예스 위 캔(Yes, We Can)”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변화(Change We Can Believe In)”를 복창하던 오바마 마니아의 추억은 희미해진 지 오래다. 

때마침 무아마르 카다피 전 리비아 국가원수가 사살돼 프랑스와 영국을 앞세우고 미국은 뒤에서 지원역할만 했던 제한적 개입의 성공이 새삼 부각됐지만 선거 효과는 크지 않을 게 분명하다. 어차피 미국 선거에서 국제문제는 크게 이슈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라크전쟁의 경우 막대한 전비와 끝없는 수렁 속으로 빠져들면서 국내 이슈가 됐기 때문에 2006년 중간선거의 최고 이슈가 될 수 있었다.

무엇이 말 한마디에 미국민을 울리고 웃기던 오바마를 이리 추락시켰을까. 그 해답의 일부는 9월17일 뉴욕 맨해튼의 주코티 공원에서 시작해 미국 전역은 물론, 지구촌 곳곳으로 확산되는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에서 찾을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오바마는 보름 가까이 침묵하다가 시위가 확산되자 슬그머니 숟가락을 얹었다. “미국인의 분노가 표출된 것”이라고 지지를 표했다. 하지만 응답자의 38%가 반월가 시위는 오바마 재선에 악재가 될 것이라고 답한 여론조사 결과(더 힐)는 점령시위대가 결코 오바마의 우군이 아님을 말해준다. 오바마는 조지 부시에게 식상한 민심을 정확하게 읽었지만 신자유주의 체제의 종말에는 둔감했다.

7000억달러의 구제금융으로 살려놓은 금융위기의 주범인 월가의 금융업체들은 오바마 취임 첫해부터 천문학적인 보너스 잔치를 다시 벌였다. 그야말로 부활한 좀비처럼 왕성한 탐욕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지지했던 폴 크루그먼은 물론, 2008년 금융위기의 원인을 제공했던 앨런 그린스펀까지 공적자금을 투입한 금융업체들의 한시적 국유화를 주장했지만 흘려들었다. 오바마는 최근 들어 부쩍 월가의 1%를 자주 비난하지만 별 반향이 없어 보인다. 오바마 마니아의 상당수는 점령시위에 나서거나, 공감하면서 99% 편에 서고 있다. 

다시 선거판에 뛰어든 오바마의 빛바랜 모습은 새삼 선거와 정치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사진발 잘 받는 토니 블레어와 빌 클린턴은 1990년대 ‘이미지 정치’로 선거에서 연승했고 오바마는 감동적인 메시지로 이겼다. 영국 노동당 선거전략가 피터 만델슨과 필립 굴드가 말한 이미지 정치의 핵심은 가급적 TV 노출을 늘리고, 복잡한 질문에 복잡한 설명으로 대응하지 말고 애매모호하게 답하면서 배시시 웃으라는 것이라던가. 그 이미지도, 오바마의 감동도 최소한 미국과 영국에서는 한물간 것 같다. 99%의 분노가 선연해지고 있을 뿐이다. 한국 선거판은 글로벌 유행에 둔감한 것 같다. 그 잘난 사진발 관리에 억대 피부클리닉의 처방까지 필요했던 걸 보면 되레 거꾸로 가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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