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리포트 김진호 특파원
아프간에서 불어오는 흙먼지가 우리 시야를 가리고 있다. 정부는 아프간을 여행금지국으로 공식 지정했다. 물론 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이다. 현재진행형인 탈레반에 의한 한국인 집단 납치극이 계기가 된 것이다. 멀게는 2004년 김선일씨 피랍, 피살 사건 이후 논의가 시작돼 완성된 새 여권법에 따른 조치다. 이라크와 소말리아도 여행금지국 명단에 올랐다. 어기면 사법적 처벌을 받는다.
한국적 현실에선 당연하게 받아들여질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주요 국가에선 전례가 없는 조치다. 이슬람권에서 자국민이 증오의 표적이 되고 있는 미국도 이러한 우격다짐식 조치는 취하지 못했다. 미 국무부 홈페이지도 아프간을 소말리아, 이라크와 함께 여행위험국으로 올려놓았다. 그러나 국무부의 ‘여행 자제 경고(current travel warning)’는 그야말로 권고다. 허락 없이 다녀왔다고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만원의 벌금형’에 처해질 일은 없다.
아프간은 한국민이 여름 휴가지로 즐겨 찾는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네팔 등 국무부가 여행위험국으로 분류한 27개국 중 하나다. 아프간을 걱정하는 크리스천들(CCA)에 따르면 아프간 내 각국의 선교사만 460여명이다. ‘위험지역’에 자국민을 내보낸 많은 나라들이 이같은 조치를 취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우선 사실상 기독교 국가인 미국이나 다른 민주주의 국가에는 ‘한국 교회’가 없기 때문일 게다. 있더라도 주류가 아니다. 한국 교회는 이상하게 국제뉴스의 초점이 되는 분쟁지역을 더 많이 찾는다. 2000년 이후 내전으로 400만명이 희생된 콩고민주공화국과 같이 숨겨진 현장에 몰려가는 일은 절대 없다. 후원자들 앞에 ‘좌판’을 깔기도, 교세 확장 홍보에도 도움이 안되어서다.
자국민이 위험지역에서 납치됐다고 정부에 무한책임을 덧씌우는 여론도 ‘주요 국가’에는 거의 없다. 이 점에서, 사건이 생길 때마다 십자포화를 맞는 한국 정부, 특히 외교부는 억울하다. “일본은 인질 가족이 되레 정부에 미안하다고 하지 않는가. 미국에서 인질사건 났다고 정부 비난하는 일이 있나”라는 외교부 당국자들의 볼멘소리가 나올 만도 하다. 현지어 한 마디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면서(또는 않하면서) 대사관 울타리 안에서 근무기간의 대부분을 보내고 돌아와도 “수고했다”고 종종 영전시켜 주는 외교부 풍토에서 험한 울타리 밖 활동을 기대하기는 애시당초 무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모든 한국적 현실에도 불구하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바로 거주 이전, 여행의 자유 등 국민의 기본권이다. 미국을 비롯해 테러와의 전쟁의 참전국 정부들이 ‘여행 금지’라는 편리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는 이유다.
많은 젊은이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지만, 한국 사회는 3년전 김선일씨 사건에 비해 사뭇 다른 대응을 하고 있다. 무조건적인 정부 비난도 없으며 당시만 해도 엄두를 내지 못하던 교계에 대한 비판도 성하다. ‘학습 효과’가 반복되다 보면, 위험지역을 여행하는 국민은 스스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며, 정부는 억울한 비판을 안 받아도 된다. 그토록 부러워 하는 미국이나 일본처럼.
아무리 급하다고, 국민을 ‘지도 대상’으로만 바라보았던 3공(共)식 정책을 꺼내 들어서야 되겠는가. 헌법소원이라도 벌어지면 정부의 승소율은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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