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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턴의 애드리브

칼럼/여적

by gino's 2012. 9. 7.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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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이 풍기는 매력은 의외로 작은 데서 비롯된다. 짧은 순간 상대방의 눈빛을 읽고 능청스레 악수를 청하는 순발력도 그 중 하나다. 특파원 시절 워싱턴 매사추세츠가에서 빌 클린턴과 조우한 것은 2009년 초가을쯤이다. 


분홍색 티셔츠에 흰 반바지 차림으로 누군가와 서서 통화를 하는 중이었다. 코러스 하우스에서 나오는 길에 느닷없이 그와 눈이 마주치자 당황스러웠다. 직업적 본능에서 카메라는 챙겼는지, 짧게라도 인터뷰를 한다면 어떤 질문을 해야 할지 하는 단상들이 머리를 스쳤다.


순간, 어쩔 줄 몰라하는 눈빛을 간파했는지 클린턴은 활짝 웃으면서 악수를 청했다. 그의 손에는 블랙베리가 들린 채였다. “만나서 반갑…” “하이” 정도의 짧은 대화가 오갔을까. 그는 곧 길가의 검은색 미니밴에 올랐고, 그제서야 둘러보니 서너명의 경호원이 지켜보고 있었다. 짧게 끝난 조우였지만, 꽤 상쾌한 인상을 남겼다. 아무리 그를 싫어하는 골수 공화당원일지라도 같은 상황에서라면 매료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오바마 대통령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있다. (출처; 경향DB)


때론 준비한 대본보다 즉흥적인 애드리브가 감동을 준다. 말과 행동이 모두 그렇다. 지난 5일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린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에서 클린턴의 쇼맨십이 유감없이 발휘됐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대선 후보로 지명하는 자리였다. 66세가 된 클린턴은 배추머리에 혈색 좋은 얼굴이 아니었다. 다소 마른 얼굴에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하지만 능청은 여전했다.


클린턴은 준비한 연설문보다 1.5배 많은 말을 쏟아내며 48분 동안 좌중을 들었다 놓았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쇼타임은 이때부터였다. 오바마가 예고 없이 연단 위로 뛰어오르자 클린턴은 얼굴에 장난기어린 미소를 띤 채 90도에 가까운 절을 했다. 이어 서로 껴안고, 어깨에 손을 올리는 스킨십을 나눈 뒤에야 연단에서 퇴장했다. 


누구나 쇼인 것을 알았겠지만, 보기에 나쁘지 않았다. 악머구리처럼 오바마의 발목을 잡는 실업률과 경기침체 등 미국 대선판의 분위기 역시 가볍진 않다. 하지만 기분좋은 애드리브가 있어 선거가 축제임을 일깨워준다. 칙칙한 과거사와 근거 없는 흑색선전, 정치적 공작의 음험한 냄새로 가득 찬 한 분단국가의 대선판보다는 분명 유쾌한 일면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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