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북핵 문제가 타결되지 않으면 개성공단 확대가 어렵다”는 김하중 통일부 장관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공단 내 남측 당국자들을 철수시켰다. 서해상에서 단거리 미사일을 발사하는가 하면 김태영 합참의장의 ‘선제공격’ 발언을 빌미로 남측 관리들의 방북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초강수까지 두고 있다. 물론 이 발언은 핑계일 뿐 북한은 남측의 의표를 찌를 기회를 보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남에서 건너간 ‘말’이 화근이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한·미는 적어도 북한을 자극하는 데 있어 확실히 역할을 바꾸고 있다. 지난 5년의 많은 세월 동안 북한을 자극한 것은 미국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두고 ‘피그미’ ‘식탁에서 버릇 없이 구는 아이’ 등으로 불렀다. 그러나 작년 말 평양행 친서에서는 ‘친애하는 위원장’으로 호칭을 바꿨다. 외교적 성과를 위해서는 ‘폭군’과도 손을 잡겠다는 융통성을 보인 것이다. 워싱턴포스트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미 국무부 동아·태국은 북한의 인권실태에 대한 보고서의 표현을 바꿔달라고 국무부 민주주의·인권·노동국에 대해 주문하기도 했다. 북한은 미국의 대화 상대방이기 때문이다.
좋은 말이 빚이 될 수도 있다. 새 정부 안팎의 인사들이 미국에 대해 잇달아 내보내고 있는 러브콜이 엉뚱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어서다. 워싱턴에선 기대감이 한껏 높아지고 있다. 조야를 막론하고 “양국간 약해진 신뢰를 회복하는 게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신뢰는 공짜로 회복되지 않는다. 버웰 벨 주한미군사령관은 전역미사일방어(TMD) 전면 참여를 촉구하는 한편, 방위비 분담을 50 대 50으로 하자고 강조하고 있다. 조지 부시 행정부와 코드가 맞는 미국경제연구소(AEI)가 지난달 ‘미·남한관계, 새로운 협력의 시대?’를 주제로 연 세미나장에서는 구체적인 ‘쇼핑 리스트’가 제시됐다. TMD 참여를 위해 필요한 PAC3미사일은 물론 자체 지휘통제시스템(C4I), 수송기 등의 구입 필요성이 제기됐다. PAC3는 장거리미사일 요격용이다. 전장의 종심이 짧은 한반도 방위보다는 미 본토 방위에 더 필요하다.
외교는 ‘말’로 한다. 새 정부의 ‘말’에 미국은 호의로 답하되 국익의 극대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북한은 적의로 해석하고 있다. 한반도 안정을 위해선 좋건, 싫건 미국과 북한 중 어느 한쪽도 백안시할 수 없다. 새 정부 주변 인사들은 참여정부가 미국에 대해 숱한 말 실수를 했다고 비난해왔다. 똑같은 실수를 북한을 상대로 반복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 김진호 특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