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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워싱턴리포트

제퍼슨과 해밀턴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4. 5.

워싱턴리포트 김진호 특파원

신생국 미국은 초대 국무장관 토머스 제퍼슨과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 진영으로 양분됐다. 각각 제퍼소니언과 해밀토니언으로 불리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미국적 가치의 양대 산맥이다. 제퍼소니언은 이상주의를, 해밀토니언은 현실주의를 대표한다. 제퍼슨이 자작농 토대의 ‘자유의 제국’을 꿈꿨다면, 해밀턴은 금융과 무역입국을 도모했다. 외교적으로 제퍼슨은 친 프랑스를, 해밀턴은 친 영국을 외쳤다. 조지 헤링의 근간 「식민지에서 슈퍼파워까지」(2008·옥스퍼드대)가 전하는 미국 외교사의 한 대목이다.

(AP 연합통신)



1792년, 에드몽 샤를 제네 신임 주미 프랑스 공사가 부임하면서 양 진영은 격돌했다. ‘미·불 영구동맹’을 명분으로 미국의 모든 항구를 적국인 영국으로부터 차단해달라는 제네의 요구가 빌미였다. 프랑스 혁명에 찬동한 제퍼소니언은 해밀토니언을 ‘영국의 사람들’이라고 비난했고, 해밀토니언은 ‘프랑스의 도구들’ ‘급진 혁명주의자들’이라고 되받았다. 대화정치는 겉돌았고, 언론의 대리전으로 이어졌다. 종종 거리에서까지 격돌했다고 하니 감정적인 대립 역시 상당했던 것 같다. 논란은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이 영·불 사이에서 중립을 결정함으로써 제퍼슨의 판정패로 끝난다.

43개월의 특파원 생활을 마감하면서 장황하게 제퍼소니언과 해밀토니언의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한국 내 친미·반미 논란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서다. 선택지가 두 개였던 미국과 달리 우리는 분단상황에서 한·미동맹에 명운을 걸고 있는 점이 다를 뿐이다. 해밀턴과 제퍼슨은 결과적으로 모두 미국의 국익에 보탬이 됐다. 해밀턴은 미국이 프랑스의 압도적인 입김에서 벗어나게 했다. 제퍼슨의 사대주의는 후일 ‘루이지애나 매입’을 성사시키면서 결실을 맺었다.

한국은 더 이상 “예스(Yes)”라고만 하는 우방이 아니다. 미국 역시 그걸 간파하기 시작한 것 같다. 공적·사적으로 접한 미 행정부 관계자들은 ‘효순·미선이의 죽음’을 계기로 한국민의 변화를 깨닫고 있었다. 다만 한·미관계가 국내 정치에 이용되는 걸 극도로 경계하고 있다. 그러면 정부가 아니라, 한국민으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이다. “지난 10년간 미·한관계가 약화됐다”고 주장하는 미국의 일부 인사도 인정하는 대목이다. 미국이 하토야마의 일본에서 추체험하고 있는 시대상이기도 하다. 미국산 쇠고기 파동은 한국 정부가 민심을 거슬러 미국에 과잉 근접할 때의 부작용을 보여주었다.

어느 한쪽도 절대 옳거나 절대 그르지 않다. 한국 내 친미·반미가 제퍼소니언과 해밀토니언이 그러했듯, 또 지금도 그러하듯 서로 경쟁하는 게 나쁘지만은 않다. 한·미동맹도 활용하기 나름이다. 하지만 여전히 애국이 친미와 동일시되는 ‘미국 콤플렉스’만은 없어졌으면 한다. ‘자주=친북’이라는 단세포적인 발상도 문제다.

미국은 운이 좋았다. 제퍼슨과 해밀턴의 사대주의가 모두 먹혔다. 한쪽만 있었다면 슈퍼파워 미국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국도 운이 좋을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갈등을 아우를 ‘한국의 조지 워싱턴’이 아직 나오지 않은 건 분명한 듯하다. 올해도 워싱턴의 4월은 흐드러지게 피어난 벚꽃이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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