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5.
법원이 야스쿠니 신사 방화 혐의로 일본 측의 송환 요청을 받아온 중국인 류창의 인도를 거부한 것은 법과 상식을 모두 충족시키는 결정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는 엊그제 류창의 방화 동기가 “정치적 대의에 대한 정치적 항의를 위해 행해진 것”이라고 규정하고 정치범의 경우 송환을 거부할 수 있는 한·일 범죄인인도조약 3조를 적용했다. 일제가 저지른 만행에 대한 인식과 분노에 기인한 범행인 데다 범행대상인 야스쿠니 신사가 단순한 종교시설이 아니라 국가시설에 상응하는 정치적 상징성이 있는 곳이라는 판단에 근거한 것이다. 나아가 “류창의 인식과 견해는 대한민국의 헌법 이념 및 유엔 등 국제기구, 대다수 문명국가가 지향하는 보편적 가치와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고 명시함으로써 일제의 반인도적인 범죄에 대한 국제사회의 통념을 따랐다.
류창을 일본에 송환한다면 과거사를 반성하기는커녕 미화하고 있는 일본 극우세력에게 핍박받을 것이 불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재판부가 인정했듯이 류창은 한국인 외할머니가 위안부 피해자인 데다 외증조부는 한글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중국인 조부 역시 일제에 항거하다 사망했다. 일본 측 주장대로 방화혐의에만 초점을 맞추었다면 국내법과 국제법은 물론 인도주의 원칙에 어긋나는 결정이 됐을 것이다. 일본 정부는 한국 사법부가 독자적으로 판단한 것인 만큼 이를 존중해야 마땅하다. 일본이 반발한다면 올해 새 출발을 하는 양국관계에 암운을 던질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남우세를 사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본의 누카가 후쿠시로 자민당 의원은 어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특사 자격으로 박근혜 당선인을 만난 뒤 외교통상부를 찾아 한국 법원의 류창 인도 거부 결정에 유감을 표명했다. 박 당선인은 특사들에게 “양국이 새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계기로 서로 간에 여러 분야에서 노력을 기울여 국민 정서에 맞는 신뢰를 구축하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일본 측은 박 당선인이 말한 ‘국민 정서’의 의미를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한·일 간 과거를 묻고 간다는 식의 안이한 발상은 필연적으로 동티를 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박 당선인은 임기 초 대일관계에서 창대한 미래를 강조하다가 초라한 결말을 내놓은 역대 대통령의 실패를 반복하지 말기 바란다. 과거사는 외면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법원이 류창 인도 거부 결정을 내린 날, 또 한 명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가 망백의 나이에 세상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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