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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워싱턴리포트

대한민국, 핵개발 시대의 추억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2. 25.

핵개발 시대의 추억

워싱턴리포트 김진호 특파원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1970년대 말 어느 날이었다. 교련복 차림의 학생대표가 갑자기 교실로 들어서더니 운동장으로 집합하라고 말했다. 이유도 붙이지 않았다. 운동장에서는 언제 준비했는지 데모용 플래카드와 머리 띠가 배포됐다. ‘미국의 청와대 도청을 규탄한다’는 내용이었다. 느닷없이 관제데모에 동원된 것이다. 어깨를 겯고 운동장을 돌면서 흥분한 데모군중으로 변해갔다. 유신 말기 폐쇄사회에 익숙해진 학생들에게는 생애 처음 경험하는 흥분이었다. ‘중앙정보부원이 서울에만 수십만명이 돌아다닌다더라’ ‘엊그제 누가 정권을 비난했다가 소리없이 끌려갔다더라’는 ‘카더라 통신’이 유언비어가 아니라 실제상황이던 시대, 정권이 10대들에게 제공해준 파격의 장(場)이었다. 북한 또는 미국을 규탄하는 여의도 군중집회에 학생들이 자주 동원되던 시절이었다.

이달 중순 워싱턴을 찾은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게 돌발적으로 물었다. “70년대 말 한국의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어떻게 보느냐”고. ‘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밝힌 그가 북핵의 위협을 목소리 높여 강조한 뒤였다. “당시는 주한미군이 철수한다고 했고 중공과 소련도 공산권이었다. 군사력에서도 북측이 우위였다. 국민의 안전을 생각해야 하는 게 국가지도자의 책무가 아니었겠는가.” 몇초간 정적이 흐른 뒤 돌아온 답이었다. 워싱턴특파원 간담회를 끝내고 총총히 사라지는 그에게 하지 못한 말이 입속을 맴돌았다. “그게 바로 북한 김정일 정권의 핵개발 논리”라고.

논리적으로만 보면 냉전시대 박정권이 직면했던 위기는 바로 냉전 이후 김정권이 마주한 상황과 닮은꼴이다. 우방국(중·러)의 ‘배반’과 남북간 비대칭 전력이 야기한 고립무원의 처지도 비슷하다. 물론 북한의 핵개발을 합리화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 안보를 위협하고 전세계에 핵테러리즘의 공포를 확산하고 있는 주범이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기에 한·미 동맹의 방어막을 더욱 튼실하게 짜야 한다.

그럼에도 북핵을 보는 한·미간 인식이 같을 수는 없다. 한반도 북쪽에서 방사능구름이 뭉실 떠오르는 것을 보는 것과 태평양 건너에서 보는 것과 어떻게 위기의 체감온도가 같겠는가. 당연히 동맹국 미국과 함께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적어도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는 것으로 봉급을 받는 정치인이라면 좀 깊은 고민이 있어야 한다. 북측 핵개발의 이유에 대한 이해가 없이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여건, 야건 정치인들이 ‘모든 옵션’을 탁자 위에서 거두지 않고 있는 미국 고위당국자들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는 것만으로 곤란한 이유다.

‘2·13합의’에 기대가 모아진다. 남측의 대량살상무기 개발이 무위로 돌아갔듯이 작년 10월 풍계리 상공에서 반짝했던 북측의 꿈도 긴 세월 뒤 한낱 이야깃거리가 돼야 한다. 관제 반미데모를 벌이던 그날, 한 동급생이 스크럼을 짜고 교문으로 돌진하던 흥분한 ‘시위대’에 밀려 넘어졌다. 얼굴에 심한 부상을 입고 다음 학기에나 학교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어두운 시대의 씁쓸한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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