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세계읽기]남파공작원 김동식의 ‘25시’
ㆍ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평생을 누군가의 이름으로 또는 ‘아무도 아닌 자’의 이름으로 살아야 하는 삶도 있다. 삶은 분명 외길이건만 여기도 저기도 아닌 가상현실을 체험하다가 그 가상현실이 진짜현실로 변해온 세월. 남파공작원 김동식이 남한 땅에서 18년째 이어오고 있는 삶이다.황해남도 용연에서 나고 자란 소년은 남한의 고등학교 1~2학년 격인 고등중학교 4학년 초 우연히 학교를 찾아온 군당 간부의 눈에 띈다. 이때부터 1년 동안 수십번의 신체검사와 군당·도당·중앙당 간부들과의 면접 테스트를 해야 했다. 그처럼 군에서 뽑혀 해주의 도당청사에 모인 또래들만 200여명. 이 중 15명이 선발돼 평양으로 호출됐다. 당은 전국에서 6명을 가려낸 뒤 이 중 3명만을 선택했다. 출신성분과 학과성적, 판단력, 체력 등을 꼼꼼히 따진 결과다. 정상적인 국가에서 전국 단위의 인재모집 과정에 최종 선발된다는 것은 기쁨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마지막 관문을 통과한 그에게 맡겨진 과업은 ‘혁명가’의 길이었다. 1981년 3월 대남공작원을 양성하는 평양의 김정일 정치군사대학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대학 4년간 학과 수업과 함께 야간행군·100리 달리기·사격·격술·숙영·접선·비트 숙면·무인 포스트 발굴 및 매립 등 혹독한 훈련을 받는다. 손바닥만한 야전삽으로 1.5t 트럭 한 대 분량의 흙을 파내야 하는 비트만 대학 시절 100여개 팠다. 잠수와 수영 훈련은 20일간 하루 7~8시간을 물속에서 치러내야 했다. ‘용광로’에서 4년을 보내고 나서도 1990년 5월 처음 남파되기까지 꼬박 5년간 끝없는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했다. 서울 토박이 출신의 남한말 강사와 1년간 합숙하면서 서울 말씨와 남한 고등학교 졸업생 수준의 상식을 익힌 적구화(敵區化) 훈련은 액자 속의 삶이었다. 남한 슈퍼와 여관, 이발소 등을 갖춘 생활관 체험도 했다. 실미도 북파공작원의 경우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선발 및 훈련 과정이다. 최고의 음식과 숙소, 편의시설이 제공됐다. 고정간첩 이선실을 무사히 북으로 데려오고 남한 사람 두 명을 포섭한 1990년 1차 남파공작의 공으로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다. 하지만 잃은 것이 더 많은 삶이었다.대학을 졸업한 뒤에야 4년 만에 고향의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본래 성이 K씨인 그는 영원히 이름을 잃었다. ‘이철호’ ‘김돈식’을 거쳐 지금은 ‘김동식’이라는 가명을 쓰고 있다. 1995년 두 번째 남파공작에선 남한 운동권 학생 출신 7명을 만났지만 포섭에 실패했다. 전향한 고정간첩 ‘봉화 1호’의 제보로 충남 부여에서 매복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총상을 입고 정신을 잃은 순간 15년간의 공작원 생활은 끝났다. 우리는 루마니아인 요한 모리츠가 유태인 수용소와 헝가리, 독일, 미군 수용소를 전전하며 보낸 ‘25시’를 게오르규의 소설로 접했다. 하지만 남파 공작원 삶의 세밀화를 들여다볼 기회는 없었다. 김동식이 최근 펴낸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기파랑)는 그 일단을 보여준다. 남에서 얻은 두 아들 민규·민석이를 위해 틈틈이 적어온 기록의 흔적이다. 출판사에서 단 책 제목은 정치적 작위의 냄새가 역력하다. 중년에 접어든 김동식에게 올해는 분재된 남한살이 십수년 만에 처음 제한된 삶의 영역을 넓힌 해이다. 연초 북한대학원대학에서 북한의 대남혁명전략 연구로 박사학위를 딴 데 이어 작가로 데뷔했다. 언젠가 통일이 된다면 남한 정착과정에서 겪은 숱한 소회를 묶어 이 책의 2부를 써야 할지도 모른다. 부모 형제는 강제수용소에 보내졌다고 한다. 우리에겐 귀한 기록이지만, 정작 자기 삶의 절반을 담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기록 역시 아직은 분단상태인 것이다. 다행히 그는 “대남공작원의 길은 내가 원해서 택한 길은 아니었지만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한다. “인생은 지우개로 지울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것이니까….”<김진호 선임기자 jh@kyunghyang.com>
입력 : 2013-07-12 21:20:56ㅣ수정 : 2013-07-12 21:20: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