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를 그리 급하게 가십니까.” 개성공단 시범단지 입주업체인 리빙아트의 첫 제품생산 기념식이 있었던 2004년 말로 기억된다. 옥외 행사장에서 주동창 북측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장의 연설이 끝나고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기념사가 막 시작된 직후였다. 맨 앞 열에 앉아 있던 주 국장이 벌떡 일어나 행사장을 벗어났다. 기자의 잔혹성이랄까, 바로 그를 뒤쫓아갔다. 남측 대표단 400여명의 좌장격인 정 장관의 연설이 막 시작된 시점에 보란 듯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연유가 무엇이었을까. 하지만 명확한 목적지가 없는 갈지자 행보였다. 두리번거리던 주 국장은 쫓아오는 남측 기자가 신경 쓰였던지 “위생소(화장실)가 어딘가…”라고 우물거린 뒤 시야에서 멀어졌다. 핵심 청중을 잃은 정 장관의 연설은 맥이 빠졌다.
당시 통일부 관계자들 역시 “화장실이 급했는가 보다”라고 얼버무렸다. 이날 리빙아트가 출시한 ‘통일냄비’가 서울의 한 백화점에서 팔리는 이벤트에 파묻혔지만 현장에서 목격한 주 국장의 행태는 의도적으로 남측을 무시하려던 것이 분명했다고 본다. 행사장의 북측 대표였다. 설령 설사가 나오려 했다고 해도 자리를 지켜야 마땅했다. 그게 도리이고 국제적 상식에 부합하는 행동이었다.
남북대화나 교류·협력의 세밀화는 종종 구질구질하다. 길들이기로 보아야 할지, 자존심 대결로 보아야 할지 남북 사이에는 상대를 굴복시키고야 말겠다는 조급증이 드러나곤 한다. 개성공단의 발전적 정상화를 논의하던 남북 당국 간 실무회담이 6차를 끝으로 결렬되면서 사실상 폐쇄 단계에 돌입했던 지난 7일 극적으로 분위기가 반전됐다. 북측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공단 재가동 및 남측 기업들의 출입 허용, 북측 근로자들의 정상 출근 등 진전된 입장 표명과 함께 7차 회담 재개를 전격 제의했다. 정부는 조평통 담화를 ‘총론적으로 전향적’으로 평가하며 북의 회담 제의를 수락했고, 북측은 이에 “좋은 결실을 기대한다”는 회신문을 보내왔다.
전조가 그리 밝지만은 않다. 북측이 회신문 말미에 넣은 한 구절이 발단이 돼 벌어졌던 해프닝이 상서롭지 못한 단서를 제공한다. 북측은 전날 자신들의 7차 회담 제안 소식을 전한 남측 일부 언론에서 “백기를 들었다”는 식으로 폄하한 것을 염두에 두었는지 “(우리들의) 아량과 대범한 제안에 찬물을 끼얹는 말을 삼가 달라”고 언급했다. 이를 허투루 넘길 박근혜 정부가 아니다. 통일부는 하루가 지나서야 “우리 측은 어제 북한 전통문의 일부 표현이 상호존중의 자세에서 벗어난 것”이라는 입장을 북측에 전달했다고 우정 발표했다. 남북관계를 투명하게 공개하겠다는 의도에서 통일부가 결정, 발표했다고 한다. 대통령 1인에 무게가 과도하게 실린 정부 스타일로 보아 윗선에서 빨간펜을 들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입력 : 2013-08-12 21:43:44
대북포용정책을 추진하던 지난 정권에선 북한의 체면을 중시해 무례를 가급적 부각하지 않던 분위기였다. 신뢰 프로세스를 내세운 박근혜 정부는 남측 정부도 국민감정과 국제적 기준을 잣대로 작은 디테일에도 어깃장을 걸고 있다. 참여정부가 남북관계에서 속도전을 추진했다면 박근혜 정부는 지구전을 강조한다. 북측과의 접촉과정에서 발생하는 에피소드를 대하는 데 있어 어느 쪽이 100% 옳다는 판단은 잠시 미뤄두자. 중요한 것은 목전의 회담을 꼼꼼히 챙기는 것뿐 아니라, 그 이후를 내다보는 혜안이다. 개성공단 7차 실무회담은 4개월여 끌어온 개성공단 파행의 종착점이자 박근혜 정부와 김정은 체제가 풀어나갈 남북관계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북한의 돌연한 공단 중단 사태가 재발해서도 안되지만, 뿔을 고치려다 소를 죽이고 마는 선택은 곤란하다. 4년 반 남짓 남은 임기는 결코 긴 시간이 아니다. 북핵문제, 한반도 평화, 나아가 동북아 평화협력 체제를 구축하겠다는 긴 프로세스에 아직 진입조차 하지 못한 상태가 아닌가. 상호존중 역시 중장기적 프로세스 속에서 풀어야 할 과제이지 당장 오늘 내일 안으로 끝내야만 하는 숙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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