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한반도읽기]‘한반도의 자해’가 아픔의 원천
▲ 한반도는 아프다…한완상 | 한울
1993년 2월25일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라고 선언했다. 이는 김일성 주석을 비롯한 북한 수뇌부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하지만 같은 해 6월4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는 “핵 가진 자와는 악수도 하지 않겠다”는 폭탄발언을 내놓았다. 북한의 핵보유 사실이 확인되지 않았을 때의 얘기다. 대통령이 분단국가의 명운이 걸린 외교안보 문제에서까지 국민과 여론을 상대로 깜짝쇼를 하려 든다면 곤란하다. 정책은 꼬이고, 국가의 갈 길은 묘연해지기 때문이다. 이를 지근거리에서 바라보던 문민정부 초대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이자 ‘원조 햇볕정책’의 주창자인 한완상씨의 심정은 어땠을까.
물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입장이 180도 바뀐 것은 핵무기 프로그램에 대한 북한의 뿌리 깊은 집념과 게릴라식 대남전술이 한몫을 한 게 사실이다. 북한은 하필 남측에서 비전향 장기수 리인모 노인의 북송 방침을 발표한 다음날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해 연착륙할 수 있었던 문민정부의 대북정책을 흔들었다. 이럴 때일수록 지도자는 견고한 철학과 리더십으로 난국을 헤쳐나가야 마땅했다. 하지만 문민정부는 북핵 위기가 펼쳐지고 빌 클린턴 미국 행정부가 외교력을 집중해 일괄타결안을 도모하던 굽이굽이마다 판을 뒤집으려는 술수를 구사해 남북관계는 물론 한·미관계까지 소원케 했다.
미국 에모리 대학에서 함께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오랜 인연을 맺어온 제임스 레이니 박사가 1993년 10월 주한미국대사로 부임했다. 그러나 한 부총리는 레이니 환영연에 참석할 수가 없었다. 청와대에서 세 차례나 전화를 걸어 불참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레이니가 에모리대 총장시절 명예박사학위를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만 주고, 김영삼 전 대통령에는 주지 않았기 때문일까.
한완상씨가 최근 펴낸 <한반도는 아프다>는 스스로 ‘거창한 정치감옥’으로 표현한 문민정부 10개월 동안 겪었던 우스꽝스러운 권력의 본질이 담겨 있다. 하지만 책 제목이 의미하듯 한씨가 머리뿐 아니라 가슴으로, 창자로, 뼛속까지 아픔을 느꼈던 연유는 다른 데 있다. 남한의 극우와 북한의 극좌가 ‘적대적 공생’을 하면서 지금도 역사적 고통과 구조적 고난에 신음해야 하는 한반도의 자해적 상황이 아픔의 원천이다.
나그네의 두꺼운 옷을 벗기려면 강풍보다 햇볕이 유효하다는 그의 신념은 김대중 정부에 들어서야 빛을 봤다. 하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이 너무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너무 많이 했다. DJP연합의 한 지붕 아래 보수세력과 함께 정권을 꾸려가야 했던 구조적 한계이기도 했다. 그 단적인 예가 1998년 4월 베이징에서 열렸던 남북 차관급 비료지원 회담이었다고 한씨는 회고한다. 북이 이산가족 상봉을 수용하면 비료를 주겠다는 선후논리 또는 경직된 상호주의 사고방식 때문에 회담은 결렬됐다. 그 끝에 북한은 대포동 미사일을 쏘고 헌법을 개정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취임하면서 강경하게 나왔다. 한씨는 당시 비료회담만 잘 풀렸어도 햇볕정책이 활짝 필 가능성이 더 컸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군사독재시절의 엄혹한 현실을 돌파해온 한씨는 김대중 정부에서 교육부총리를, 노무현 정부에서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지냈다. 하지만 그가 천착해온 주제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었다.
그는 정권 출범 초기 전향적으로 시작했다가 극우로 끝난 문민정부의 실패를 남과 북의 강경파가 판을 깨면서 스스로의 정권기반을 다지던 적대적 공생의 공식으로 해석한다.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족쇄다. 한씨는 올해 초 경향신문 신년 인터뷰에서 박근혜 대통령에게 두 가지를 주문했다. “정치적으로는 아버지 유산을 극복하고, 남북관계와 외교는 MB를 극복해야 한다”고. 취임 첫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불행히도 박근혜 정부는 두 가지 모두 역행하고 있다. 그래서 한반도는 더 아프다.
<김진호 선임기자 jh@kyunghyang.com>
입력 : 2013-11-15 19:3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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