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택…미하일 고르바초프 지음 | 프리뷰러시아와 북카프카스 지역의 경계에 위치한 스타브로폴 지방은 절반 가까이가 농사를 짓기 어려운 스텝지역이었다. 1974년 오랜 숙원 끝에 관개시설과 대수로가 완성되자 고려인들이 지방 당 제1서기인 미하일 고르바초프(고르비)를 찾아왔다. 양파를 계약재배해 수확량 중 1㏊당 45t을 집단농장이나 국영농장에 주고, 나머지를 자신들의 소유로 하겠다는 제안을 내놓았다. 고려인들은 양파밭 옆에 쳐놓은 천막에서 숙식을 하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밤낮으로 일했다. 고려인들은 스타브로폴 지방의 양파 소요량을 모두 채우고도 1만5000~2만t을 더 생산해 다른 지역에 공급했다. 이른바 ‘양파 사건’이 터진 것은 얼마되지 않아서였다. 소련 연방 검찰청과 공산당 기율위원회가 개입해 사회주의 원칙을 어긴 ‘불법적 약탈’이라고 규정하고 관리인들을 문책, 처벌했다. 고려인들은 쫓겨났다. 현지 주민들이 다시 양파 재배를 맡았지만 자급은커녕 매년 우즈베키스탄에서 수입을 해야 했다.
40대 초반의 공산당 지도자 고르비는 고려인들처럼 힘들게 일하지 않더라도 좀 더 현대적이고 그만큼 효과적인 노동 인센티브제도를 도입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모스크바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자마자 고향 스타브로폴에 내려와 20여년 동안 지방 당간부로 지내면서 고르비는 뼛속 깊이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브레즈네프 18년 동안 소비에트 체제는 철저하게 생기를 잃었다. 농업은 ‘국내 식민지’로 전락했다. 비료와 농기구를 비롯한 모든 공산품 가격이 치솟는 동안 연방정부의 농산물 매입가격은 수십년째 제자리였다. 브레즈네프조차 생전에 무기(총)와 식량(버터)을 병진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지만 낡은 거함은 U턴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병들어 있었다. 곳곳에 포진한 노멘클라투라 계층은 특권을 누리기에 급급해 어떠한 변화도 원치 않았다. 현장 지도자의 문제의식을 갖고 1978년 공산당 중앙위에 등장한 고르비는 그러나 브레즈네프와 안드로포프, 체르넨코가 3년 상관으로 잇달아 세상을 뜨기까지 또 기다려야 했다.
1985년 3월 공산당 서기장 취임 일성으로 그는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것이다”라고 말한다. 소련이 당면한 숱한 불합리와 불평등, 모순을 인정하고 위기에 대응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페레스트로이카(개혁), 글라스노스트(개방), 미국과의 전략핵무기 감축협상, 1991년 8월 공산당 보수파의 쿠데타, 보리스 옐친의 등극과 소련의 소멸 등 이후 숨가쁘게 진행된 역사는 알려진 바이다.
올해 83세에 접어든 고르비가 지난해 또 다른 자서전을 내놓았다. 1995년에 이어 두번째 자서전이다. 본인도 뻘쭘했는지 모두에 이번 책은 회고록도, 소설도, 역사평설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규정한 이번 자서전의 성격은 ‘아내 라이사와 함께한 삶에 대해서 쓴 나의 이야기’이다. 그 자신의 설명대로 대학시절 만나 1999년 혈액암으로 세상을 뜨기까지 함께한 부인 라이사와 얽힌 추억이 곳곳에 스며 있다. 암투병하는 라이사의 간호기는 눈물겹다. 첫 자서전이 아직 정치일선을 떠나지 않았던 시절에 내놓은 목적 중심의 책이었다면, 이번 책은 오히려 삶을 되돌아보는 여유와 관조가 더 스며들어 있다. 진정한 의미의 회고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스타브로폴 지방 당 시절부터 수십년 멘토였던 쿨라코프 전 소련 공산당 비서가 라이사에게 “결혼생활을 유지하면서 나와 사귀자”고 추파를 던진 것과 같은, ‘처음 공개하는 이야기들’이 양념처럼 들어갔다. 그의 말대로 다리 밑으로 수많은 물이 흘러갔다. 쿨라코프나 모욕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권좌에서 몰아낸 보리스 옐친이나 자신의 등에 칼을 꽂은 과거 공산당 동료들도 태반이 세상을 떠났다. 그 역시 이제는 냉전시대 지도자 중에서 살아 있는 희귀한 노인이 됐다. 야코블레프의 말대로 정치적 재기가 불가능한 ‘이미 역사의 페이지를 다 쓴 사람’이다. 그러한 노인이 전해주는 한 시대의 굵직한 역사가 개인사와 얽혀 역사의 또 다른 결을 발견하게 한다.
<김진호 선임기자 jh@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