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자신의 트윗계정에 올려놓은 사진. 개인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이다. 그는 댈러스에 있는 집과 크로포드 목장 및 메인주 케네벙크포트의 가족 별장에 각각 화실을 차려놓고 하루 3~4시간 씩 이젤 앞에 앉는다고 한다.
“가끔 ‘대통령 시절이 그리운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전혀 그렇지 않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군복을 입은 사람들에게 경례하던 것은 그립다.”
초상화 화가로 거듭난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최근 NBC 방송에 출연해 한 말이다. 미국인들이 사고뭉치 도널드 트럼프에게 질려서일까. 우리 나이로 지난해 고희(古稀))를 넘긴 부시 전 대통령이 새삼 미국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직접적인 계기는 자신의 세번째 저서 <용기의 초상들(Portraits of Courage)>의 발간과 2일부터 텍사스주 댈러스에 있는 ‘조지 W 부시 기념도서관’에서 열린 개인 초상화전이다.
골프와 산악자전거를 즐기던 대통령에서 초상화 그리는 노인으로 변신
저서와 전시회의 주제는 모두 상이용사들이다. ‘미국의 전사들에게 바치는 군통수권자의 헌사’를 주제로 한 전시회에는 부시가 그린 66명의 초상화와 여러명의 얼굴을 함께 그린 한폭의 대형 유화가 전시된다.
재임중 틈만 나면 메릴랜드 캠프 데이비드의 대통령 주말별장이나 텍사스 크로퍼드의 개인 목장으로 달려가 골프채를 잡거나, 산악자전거 라이딩을 하던 부시가 그림에 푹 빠진 것은 퇴임 3년 뒤인 2012년부터다. 처음엔 고양이나 강아지, 정물화를 그리다가 초상화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2014년 봄에는 재임중 만난 각국 지도자들의 초상화를 모아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이후 자신의 그림 선생님 세드릭 허커비로부터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당신이 잘 아는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야 한다”는 말을 듣고 상이용사들의 초상화 작업에 착안했다.
부시는 지난해 말 트윗에 자신의 작업을 소개하면서 “지난 몇달 동안 부상당한 전사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모두) 내가 아는, 내가 내린 명령을 수행하다가 다친 훌륭한 남자, 여자 군인들이다. 상이용사의 날 뿐 아니라 매일 그들을 생각한다”라는 글을 올렸다. 5일 현재 9만1590명이 ‘좋아요’를 눌렀고, 3896개의 댓글이 달려 있다.
미국 공군 하사 출신의 상이군인인 자니 엘록이 지난 2월28일 텍사스주 댈러스의 조지 부시 도서관에 걸린 부시의 그림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뒤편의 그림 오른쪽에 그의 초상이 보인다. 댈러스/AFP연합뉴스
재임 중 부시는 댓바람에 북한과 이란,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지목하고 그중 이라크를 침공했다. 이라크 침공은 사담 후세인의 대량살상무기(WMD)를 빌미로 단행했지만, 사실무근으로 밝혀지자 뒤늦게 독재타도를 사후 명분으로 내세웠다.
그는 퇴임을 앞둔 2008년 말 ABC방송 인터뷰에서 재임시절을 되돌아보며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었다.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위기를 남겨놓은 것에도 사과한 것은 물론, 이라크 침공에 대해서도 “전쟁을 치를 준비가 돼 있지 않았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했다. 부시가 퇴임 뒤 상이용사들을 최우선으로 두고 챙기려는 것도 잘못된 전쟁에 대한 일말의 후회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흔히 전직 대통령의 이상적 모델로 꼽는 것은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92)이다. 재임 시절 보다 퇴임 뒤 더 존경을 받고 있다. 미국인들 뿐 아니라 많은 세계인이 존경한다. 1994년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로 치닫고 있던 한반도 북쪽을 전격 방문한 것을 비롯해 중동과 아프리카, 북아일랜드, 아이티 등 분쟁의 현장을 찾아다니며 평화의 물꼬를 텄다. 연장도구를 챙겨 지구촌 빈민가를 돌며 집을 지어주고 있기도 하다.
조지 부시는 여러가지 면에서 카터와는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한다. 수준의 차이라기 보다는 스타일이 달라서다. 부시는 진지함과는 거리가 멀었었다. 취임 초인 2002년 텍사스 베일러 대학에서 열린 경제문제 세미나에 참석했다가 “몸을 비비꼬고 엉덩이를 들썩이다가 45분도 채우지 못하고 일어났다”는 조롱(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모린 다우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면서 부시도 많이 변한 것 같다.
“내 안에 렘브란트가 갇혀 있다”
부시는 “평생 미술관을 몰랐지만, 그림을 배운 이후 이제는 서너시간 씩 머물면서 화가의 붓 터치나 색감에 대해 들여다보곤 한다”고 소개했다. “내 안에 렘브란트가 갇혀 있다”는 농담도 종종 한다고 한다. 그림을 그릴 때 가장 어려운 부분에 대한 질문(시사주간 타임)에는 서슴없이 “눈”이라고 답했다. “눈에 담긴 표정을 제대로 잡아내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한다”는 것이다. 독서와 산책, 명상 보다는 스포츠 활동을 즐겼던 그로서는 늙그막에 관조의 시각을 갖게된 것인지도 모른다.
퇴임 뒤 그림을 그렸던 각국 정치인은 여러명이다. 미국 대통령 중에는 율리시스 그랜트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그림그리기를 취미로 삼았다고 한다. 지미 카터는 자연경관 그리기를 즐겨왔다. 무거운 책무를 걺어지고 격동의 세월을 보낸 뒤 이젤 앞으로 돌아와 앉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지나온 세월과 인물을 정리하는 작업의 방편이 될 수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시의 변신이 반가우면서도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께끔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부시 전 대통령이 지난 2월28일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연 기자회견 장에서 자신의 새 책 <용기의 초상들>을 들고 있다. 댈러스/AP연합뉴스
“(예술의) 기쁨을 누릴 자격이 있는가” 쓴소리도
상이용사들의 초상화 작업을 소개한 부시의 트윗에 달린 댓글 가운데 단순한 비아냥이 아닌 작심하고 내놓은 쓴소리가 적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한 트위터리안은 “당신은 이 사람들의 불필요했던 부상과 죽음에 책임이 있다”면서 “예술은 제발 그냥 놔두고, 뜨개질이나 잡아라.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놓고 (예술의)기쁨을 누릴 자격이 당신에겐 없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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