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화성-14형 미사일이 알래스카를 사정권에 둔 것으로 확인됐다는 보도가 전해지자 마자 외신은 자료사진들 더미에서 평화로운 알래스카의 풍경 사진을 올리기 시작했다. 알래스카 이스턴 축치해변에서 바다 코끼리들이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2012년 7월17일의 모습. AP연합뉴스
“언젠가 알래스카를 차지하는 나라가 세계를 차지할 것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요충이다.” 미국의 빌리 미첼 장군이 1935년 연방의회에서 한 말이다. 북태평양의 항로를 제압할 수있는 전략적 위치를 강조한 말일 것이다. 하지만 알래스카의 방비는 의외로 허술했다. 1867년 미국이 러시아로부터 사들인 이후 알래스카는 단 한번 ‘전쟁’을 경험했다. 1942년 6월3일 호소가와 보시로 제독의 일제 북방해역함대가 별다른 저항 없이 알류샨 열도의 아투와 키스카를 점령했다. 알래스카 더치타운에 폭격도 가했다. 미국·캐나다 연합군이 이들을 내쫓는 작전을 개시한 것은 1년 뒤였다. 일본군 특유의 옥쇄작전 탓에 희생자가 적지 않았다. ‘마지막 프론티어(the last Frontier)’라는 주(州) 별명을 갖고 있는 알래스카가 지난주 부터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4일 발사에 성공한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4형이 알래스카를 사정권에 두고 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미국 언론이 전한 알래스카 주민들의 반응은 덤덤했다. 워싱턴포스트가 인터뷰한 에단 버코위츠 앵커리지 시장은 “내가 걱정하는 것은 순록이지 미사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캠핑장을 공격하는) 곰이 무섭지 폭탄이 무섭지는 않다”는 말도 내놓았다. 게다가 여름이다. 연어는 넘쳐나고 긴 낮 동안에 즐길 아웃도어라이프가 풍성하다. 하지만 알래스카는 정말 안전한 것일까.
북한의 화성-14형 미사일이 발사 장면. 북한이 외신에 배포한 사진이다. AP연합뉴스
■트럼프 행정부는 왜 대북 레드라인을 긋지 않았을까.
레드라인(Red line)을 긋는다는 말의 현실 국제정치적 함의는, 그 선을 넘을 경우 군사적 행동에 나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미국이 지금까지 북한의 핵위협에 맞서 레드라인을 그은 것은 한번이다. 북한의 1차 핵실험 다음날인 2006년 10월 9일(미국 동부시간)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 특별연설에서 “북한이 외국 정부(states)나 비정부 실체(non-state entities)에 핵무기나 핵물질을 이전한다면, 미국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그러한 행동에 대해 전면적인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두개의 전쟁을 벌이던 미국은 북한이 테러단체에 핵을 이전하는 것을 더 무겁게 보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북한의 핵위협은 미국에 ‘강건너 불’이었다. 11년이 지났다. 핵공포에 의한 피포위심리(seized mentality)는 이제 북한 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도 공유하게될 시점이 앞당겨졌다.
미국 국무부와 국방부는 화성-14형에 대해 ICBM이라고 밝혔다가 IRBM으로 수정했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북한이 ICBM 능력의 마지막 문턱을 넘었을 가능성이 지극히 높지만 이를 ICBM으로 인정할 경우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을 합리화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수도권에만 2000여만명이 밀집된 한반도에서 군사행동을 벌이는 것은 트럼프 행정부 역시 망설이지 않을 수 없는 사안이다. 알래스카가 사정권에 들어가고, 북한의 ICBM 능력이 주의보에서 경보로 바뀌었음에도 적어도 공식적으론 인정할 수없었던 것으로 봐야할 것이다.
북한 평양의 김일성 광장에서 지난 6일 화성-14형의 발사성공을 자축하는 불꽃놀이가 벌어지고 있다. 평양/AP연합뉴스
■군사행동을 포함한 대북 옵션을 업그레이드 한 미국
그렇다고 미국이 알래스카를 포기할까. 아닐 것이다. 인구가 74만1894명(2016년)에 불과하다고 해도 알래스카는 냉전의 최일선으로 철통같이 방어했던 요충이다. 지난 3일 발표된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의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은 10~20기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화성 14형 발사에서 새로운 고체연료와 이동식발사대, 전혀 새로운 엔진도 선보였다. 같은날 CNN방송은 2명의 군 당국자의 말을 인용해 북한이 핵실험을 하거나 미국을 타격할 수있는 ICBM 능력을 확보했을 경우에 대비한 군사적 옵션을 업그레이드 했다고 전했다. 맥마스터는 “(북한의)위협은 너무도 긴박하기에 과거와 같이 실패한 접근을 반복할 수 없다. 아무도 실행하길 원치 않지만, 대통령은 군사적 옵션이 포함된 일련의 옵션들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고 덧붙였다. 다음날 워싱턴을 방문할 문재인 대통령과의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같은 옵션이 논의될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한·미 백악관 정상회담 이후 발표된 어떤 자료에도 이와 직접 관련된 양국 대통령의 입장은 나오지 않았다. 미국의 니키 헤일리 유엔대사가 지난 5일 유엔 안보리에서 러시아측의 성명에 반응하고 있다. 헤일리는 대북 원유공급 중단을 비롯한 강력한 제재안을 강조하고 있지만 중국과 러시아는 제재 보다는 대화와 협상에 무게를 두면서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다. 유엔본부/AP연합뉴스
■“정전체제와 전쟁을 가르는 ‘자제’는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미국은 대북 군사적 조치의 준비는 해놓았지만 ‘진실의 순간’은 뒤로 미룬 것으로 관측된다. 그 대신 유엔 안보리 결의와 무관하게 일방적인 대북 제재를 가할 태세다. 니키 헤일리 유엔대사가 말한 해상 및 영공봉쇄, 원유공급 중단 등이 ‘한층 강화된 대북 압박’의 내용일터다. 미국의 입장은 빈센트 브룩스 한미연합사령관이 지난 5일 이순진 합참의장과 함께 발표한 공동성명에 담겨 있다. 브룩스 사령관은 ‘자제(self-restrain)’에 방점을 찍었다. 그는 “자제는 선택에 따른 것이지만 정전체제와 전쟁을 구분짓는다”고 말했다. 이어 “동맹의 국가지도자들로부터 명령이 떨어진다면 선택을 바꿀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미국이 군사력을 동원할 ‘진실의 순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헤일리 대사는 지난달 28일 의회 청문회에서 북한이 핵무기로 미국을 공격할 수있을 시기를 ‘3년에서 5년 사이’라고 밝혔다. 북한 전문가이자 항공우주기술에 정통한 존 실링은 북한이 미국 수준의 핵탄두를 보유하는 시기를 2년 정도로 내다봤다. 실링은 8일자 워싱턴포스트에 북한이 보유한 가장 강력한 핵탄두는 미국이 1945년 일본 나가사키에 투하한 20킬로톤이지만, 미국 미사일 탄두(100~475킬로톤)에 도달하려면 ‘근본적으로 새로운 디자인’이 필요하다면서 이같이 예측했다. 북한 동북부 라선 특별경제구역에서 2016년 7월24일 시베리아산 석탄이 중국행 배에 선적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 중국과 러시아 북한의 3각 무역을 상징해 보여준다. 라선/AP연합뉴스
■그레이엄 “북한의 ICBM능력을 부인하는 게 미국 정책인가” 매티스 “그렇다”
군사적으로 대치하는 북한과 미국이 내놓는 말에는 어느 정도 엄포(bluffing)가 끼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알래스카와 미국 본토가 북한의 핵위협을 확인하게 될 ‘진실의 순간’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북한이 ICBM 능력을 지금까지 처럼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강화된다면 그 시기가 더 앞당겨 질 수있다. 그때까지 북한은 실제 능력보다 더욱 강하게 발언할 것이고, 미국은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장관은 최근 “핵탄두를 장착한 ICBM으로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북한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이냐”라고 묻는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의 돌직구에 대놓고 “그렇다(Yes)”고 답했다.(CNN 6월30일 보도)
북한의 김정일 노동당 비서(왼쪽)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P연합뉴스
■세컨더리 보이콧? 불가역적인 제재의 끝은 파국이다
당분간 미국과 북한간의 공방은 충분히 예측가능하다. 북한은 ICBM능력을 더욱 키우기 위해 계속 시험발사를 할 것이고, 필요하면 6차 핵실험도 감행할 것이다. 미국은 북한의 능력증강에 맞춰 군사적 대비를 하는 한편으로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NCND(Neither Confirm Nor Deny) 태세를 유지할 것이다.
하루가 멀게 막말과 거짓정보를 늘어놓는 트럼프조차 그 ‘선’ 만은 아슬아슬하게 지켰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이 계속된다면 그 끝은 결국 파국일 수밖에 없다. 미국이 흘리는 일방적인 대북 제재 아이디어들이 트럼프가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의 영광스러운 만남의 전제로 내세운 ‘적절한 환경(under the right circumstances)’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하지만 북한과 거래한 제3국 기업이나 금융기관을 제재하는 세컨더리 보이콧은 일단 취해지면 돌이킬 수 없는 불가역적인 조치다. 2005년 방코델타아시아(BDA) 계좌 동결에서 위력을 입증한 바 있다. 불가역적인 제재로 북한을 몰아세운다면 결국 파국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짙다. 중국이 한·미 양국에 주문한 쌍궤병행(비핵화 프로세스·북미 평화협정 협상)과 쌍중단(북한의 핵·미사일 도발·한미 연합군사훈련 중단)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떤 형식이던지 변화의 계기를 마련하지 못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8일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렸던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에 참석한 뒤 백악관으로 귀환하고 있다. “세계가 북한 핵위협에 (함께)맞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특히 중국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빈손으로 귀국했다. 귀국과 동시에 미국은 대북 독자적인 제재를 흘리기 시작했다. 워싱턴/ EPA연합뉴스
■시진핑이 아닌, ‘김정은과의 큰거래’가 필요한 시점
트럼프 대통령은 마라라고 미·중 정상회담 며칠 전인 지난 4월3일자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단독인터뷰에서 북한 문제를 ‘중국과의 큰거래(Grand Bargain)’로 풀겠다고 했다. 하지만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주변에서 있었던 양자, 다자 회의에서 드러났듯이 중국은 제재에는 동의하지만 그 못지 않은 대화와 협상 노력을 강조해 미국을 좌절케 했다. 결국 큰거래의 상대를 바꿔야 한다. 김정은과 마주앉지 않는다면 ‘큰거래’는 고사하고 작은 거래도 성사시킬 수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