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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의 세계읽기]군사훈련엔 진지하고, 대피훈련엔 둔감한 한국

한반도, 오늘

by gino's 2017. 9. 4.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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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6차 핵시험을 한 9월3일 도쿄 시내에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모습이 보이는 대형 TV화면 앞을 한 행인이지나가고 있다.  EPA연합뉴스

■지나치게 요란한 일본의 대피훈련, “아베의 정치적 노림수 아닌가”

“미사일 발사. 미사일 발사. 분명한 미사일 발사(실제상황). 안전한 건물이나 지하로 대피하세요.” 한 나라는 도가 지나쳤다는 지적이 제기될 만큼 요란하게 대비하고 있다. 일본이다.

지난 9월1일 오전 9시. 일본 홋카이도현의 작은 마을 타키카와.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알리는 비상사이렌이 울리자 100여명의 남자들이 거리의 주민들을 대피소로 안내했다. 마을 농구장 바닥에는 푸른색 비닐이 깔려 있었다. 주민들은 모두 양손으로 머리를 감싼채 진지하게 훈련에 임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주말판이 전한 일본의 대피 훈련 모습이다. 북한의 중장거리탄도미사일(IRBM) 화성-12형 발사 사흘만에 실시된 훈련이다. 대피훈련은 1일 홋카이도 뿐 아니라 아오모리, 후쿠호카 등 3개 현에서 실시됐다. 이시카와현은 하루전에 실시했고, 시마네현은 오는 6일 실시한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재난 예방의 날’인 지난 9월1일 카나자와현 오다와라에서 열린 9개현 합동 재난대피훈련에 참가하고 있다. 일본의 지자체들은 기존의 재난 대비 훈련에 더해 북한의 미사일 공격에 대비한 대피훈련을 벌이고 있다. EPA연합뉴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재난 예방의 날’인 지난 9월1일 카나자와현 오다와라에서 열린 9개현 합동 재난대피훈련에 참가하고 있다. 일본의 지자체들은 기존의 재난 대비 훈련에 더해 북한의 미사일 공격에 대비한 대피훈련을 벌이고 있다. EPA연합뉴스

일본은 잦은 지진과 태풍 탓에 전세계 어떤 나라보다 정교한 재난대비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J-얼랏(Alert)’에 따라 당국은 국민들의 휴대폰에 비상 메시지를 띄우고 신속하게 주민보호에 나선다. 화성-12형이 훗카이도 상공을 지나간 지난 8월29일 오전 6시2분에도 홋카이도 주민들의 휴대폰에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인한 비상경보가 떴다. 하지만 요란한 훈련이 주민들의 공포의식만 높인다는 비난이 일고 있다. 손자와 함께 대피훈련에 참가한 한 주민은 “과연 대피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 당국이 또 경보를 보낸다면 집에 머무는 게 더 안전할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J-얼랏에 따라 경보가 발송된 8월29일 상황을 보면 일리가 있는 회의론이다.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한 시간은 오전 5시58분이고, 휴대폰 경보는 6시2분에 떴다. 하지만 4분 뒤 미사일이 홋카이도 상공을 지났고, 6시12분에 태평양에 떨어졌다. 타키카와 주민들이 대피소에 도착하기 전에 상황이 종료됐다. 대피 훈련이 오히려 북한의 위협이 노리는 프로파갠다 효과를 증폭시켜준다는 비난이 제기되는 까닭이다. 주민의 안전은커녕 김정은이나 좋아할 훈련이 아니냐는 문제 제기다. 산케이 신문에 따르면 이바라키현에서는 “대피훈련이 긴장만 높인다”면서 당국의 훈련에 반발하는 시위가 있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모처에서 수소폭탄 모형을 보면서 관계자들의 보고를 받고 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9월3일 공개한 사진이다. AP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모처에서 수소폭탄 모형을 보면서 관계자들의 보고를 받고 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9월3일 공개한 사진이다. AP연합뉴스

아베 신조 총리가 재무장과 평화헌법 개헌을 위해 북핵 위협을 의도적으로 높인다는 지적은 진작부터 제기돼 왔다. 아베 총리는 지난 4월 17일에는 중의원(하원) 공개발언을 통해 “유사시 한반도에서 넘어올 난민들을 스크리닝(심사)할 기준과 대피소 건립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 내 일본인 6만명의 보호방안에 대해서도 협의를 했다고 전했다. 지하철 사린가스 테러의 트라우마가 있는 자국민에게 “북한이 사린가스를 장착한 미사일 발사능력을 갖췄을 것”이라고 말해 한껏 위기지수를 끌어올린 바 있다. 

■지나치게 조용한 한국의 민방위 훈련, “대부분 모르고 지나갔다”

다른 나라는 도가 지나칠 정도로 대비를 하지 않는다. 한국이다. 지난 8월23일 서울의 정례 민방위 훈련은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북한의 화성-14형 시험발사에 이은 괌 포위사격 위협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화염과 분노’ 발언, 을지프리덤가디언훈련 등의 요인으로 어느 때보다 한반도의 긴장이 높아졌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미국 3대 일간지들은 일제히 민방위 훈련 르포기사를 게재했다. 요지는 “한국인들이 놀라울 정도로 태평하다”는 것이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24일자 ‘한국인들은 민방위 훈련을 안다. 하지만 신경쓰지 않는다’는 제목의 기사를 내놓았다.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는 ‘한국민들이 위협에 익숙해지면서 민방위 훈련이 갈수록 느슨해지고 있다’는 AP통신를 각각 홈페이지에 올려놓았다. 

1년에 5번 실시하는 민방위 훈련은 언젠가부터 요식행위로 변했다. 한반도 전쟁시나리오를 들먹이는 외신의 보도가 과장된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안보위험을 보도할 때 양측의 군사적 능력과 함께 민간인 대피 문제가 따라 붙는게 정석이다. 뉴욕타임스는 이미 지난 7월 북한이 휴전선에 배치한 장사정포의 사거리 안에 놓인 서울에는 3300개의 대피소가, 경기도에는 3700개의 대피소가 있다고 전한 바 있다. 지하철 역과 대형건물 지하주차장 등 대피소의 숫자는 인구에 비해 부족하지 않지만, 문제는 주민들 대부분이 어느 대피소로 피해야할 지 모른다 점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98월29일 북한이 일본 동북부 홋카이도 상공으로 발사한 중장거리탄도미사일 화성-12형의 발사모습.  AP연합뉴스e)

지난 98월29일 북한이 일본 동북부 홋카이도 상공으로 발사한 중장거리탄도미사일 화성-12형의 발사모습. AP연합뉴스e)

■“위기는 무슨 위기” 주민대피훈련, 한국과 일본의 너무 다른 풍경

한국인이 위기에 둔감한 것은 위협에 상시노출돼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실제로 북한은 휴전선에 배치한 1000여문의 장사정·방사포 만으로도 수도권을 불바다로 만들어 놓을 능력을 갖추고 있다. 위협과 공존하면서 오래전부터 감각이 무뎌졌다. 1994년 1차 북핵위기 당시 한반도에 전운이 짙어가던 무렵 로이터 통신의 서울 르포기사의 제목이 ‘위기는 무슨 위기(Crisis? What Crisis?)’이었다. 빌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 핵시설 선제타격계획을 구체화하고, 주한 미국인들 소개훈련을 실시해 전세계 언론이 한반도 전쟁위기를 보도하던 시점이었지만 서울은 지극히 태평했다.

한국인들이 민방위 훈련에 거부적인 반응을 보이는 또다른 이유는 독재시대의 트라우마 때문인 것 같다. 1975년에 시작된 민방위 훈련은 독재정권이 끊임 없이 북한의 위협을 강조하는 장치의 하나로 활용됐다. 정치 지도자 입장에서 독재시대의 기억이 담긴 민방위 훈련을 다시 거론하는 것이 정치적 부담이 갈 것이 분명하다. 주민 불안심리로 인해 일상생활에 다소 지장을 줄 수도 있다. 증권시장에도 영향이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제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많은 일본인들은 아베의 정치적 속셈을 꿰뚫어보면서도 “만사는 불여튼튼”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일본 내각의 한 관계자는 파이낸셜타임스에 “참가 주민들이 유사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지 알려주어 고맙다는 말을 전해왔다”면서 “일본을 겨냥하는 북한의 의도야 알 길이 없지만,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은 주민 안전과 보호를 위해 좋은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지나치면 모자람 만 못한다고 했지만 국민 보호에는 적용할 수없는 말이다. 북한이 핵을 포기할 가능성은 극히 적다. 협상을 통해 평화의 초석을 놓더라도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 사이 적절한 대비는 늘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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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9031829001&code=970100#csidxe9760887976187998de666b4a611b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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