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렴대옥과 김주식이 외신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국제빙상연맹(ISU) 홈페이지
여기 한장의 사진이 있다. 이틀 동안 피겨 페어 종목 경기를 마친 남녀 선수 한쌍에 수많은 외신기자들(한국 언론은 그자리에 없었다!)이 마이크를 들이댔다. 우승이라도 한 것일까. 아니다. 지난 4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16장이나 됐던 올림픽 본선 티켓을 따지 못한 선수들을 위한 패자부활전이었다. 패자들의 경기에서도 3위에 그친 팀이다. 천신만고 끝에 올림픽 아이스 아레나에 설 티켓 20장 중의 1장을 받았다. 그런데 왜 이처럼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을까.
지난 9월29일(현지시간) 독일 바바리안 알프스 자락의 오베르스트도르프에서 끝난 네벨혼 트로피 대회. 세계는 고작 3위를 차지한 북한의 렴대옥(18)-김주식(25) 팀을 주목했다. 자력으로 처음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출전권을 따낸 북한 선수들이기 때문이다. 검은 옷에 반짝이를 붙이고 나온 렴대옥과 김주식의 연기를 이틀 동안 지켜본 각국 언론은 그들의 올림픽 진출 확정 소식을 긴급 타전했다. 스포츠가 절박한 평화의 올리브가지를 내밀 수있음을 새삼 각인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북핵 위기 속에서 내년 2월9일 개막하는 평창올림픽의 평화를 희구하는 바람에서였다. 당연히 기자들의 질문은 “평창 올림픽에 참가하느냐”는 것이었다. 렴대옥과 김주식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박현선 북한팀 코치가 끼어들었다. “그건 조선올림픽위원회가 결정할 문제이다.”
렴대옥-김주식팀의 프리 스케이팅 주제곡은 비틀즈 원곡의 ‘인생의 하루(A day in the life)’이다. 4분 정도 걸린 그들의 스케이팅 동안 아이스스포츠젠트룸 경기장의 관중은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박현선 코치는 링크에 바싹 붙어서서 독려를 멈추지 않았다. 평창 피겨 페어부분 출전권을 일찌감치 따낸 미국 스케이팅 선수 티모시 레둑은 “그들은 엄청난 선수들이다. 그들의 경기를 아주 재미 있게 지켜보았다”면서 우리는 모두 세계 시민이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김주식은 “약간 긴장했지만 코치 선생님들이 우리를 믿어주셨고, 관중이 응원해주었다. 그들로부터 많은 격려를 받았다”고 말했다. 전날 쇼트프로그램에 이어 펼친 프리스케이팅이 완벽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렴대옥과 김주식은 트리플 살코를 더블 살코로 줄였다. 연습에서 두사람의 점프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캐나다인 코치 브루노 마코트의 지시였다. 렴대옥은 “국적과 배경이 다른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응원했다. 그들에게 약간이나마 기쁨을 주었다는 사실이 경기의 최고부분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가 전한 그들의 소감이다.
북한은 전통적으로 빙상종목에 국가적 차원에서 관심을 기울여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매년 자신의 생일인 2월16일 피겨 스케이팅 공연 ‘백두산상 국제휘거축전’을 열어왔다. 사망 열흘 전인 2011년 12월 5일 김정은 당중앙군사위 부위원장(현 노동당 위원장)과 함께 평양 빙상관을 찾아 선수들을 격려했다고 노동신문이 전한 바 있다. 김정일 위원장이 선수들에게 선사키로 약속한 ‘세상에서 제일 좋은 피겨 스케이트’는 그의 사후에 전달됐다.
그래서인지 렴대옥-김주식 팀에 대한 지원도 남달랐다. 이들은 지난 여름 북한 선수들로는 이례적으로 캐나다 몬트리올로 전지훈련을 보내 프랑스계 캐나다인 코치 브루노 마르코트와 그의 부인 미강 뒤아멜의 지도를 받게 했다. 뒤아멜은 피겨 페어 부문에서 두차례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을 했었다. 브루노는 렴-김 팀을 이끌고 참가한 북한 빙상연맹의 리정은 단장이 자신에게 “프리 스케이팅 경기가 끝나고 나서야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면서 북한이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전했다. 정치적으론 평창 참가 여부를 결정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북한 체육계는 출전권을 따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지난 6월 무주 세계 태권도선수권대회에 참가한 계기에 우리 측의 평창 참가 독려에 “스포츠 위에 정치가 있다”면서 냉담한 반응을 보였던 북한의 장웅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의 말도 뉘앙스가 달라졌다. 장 위원은 지난 9월16일 IOC의 온라인 TV채널에서 “정치와 올림픽은 별개라고 확신한다. 평창 올림픽에 아무런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국제 올림픽 운동의 정신과 평화의 제전을 속단하기에는 한반도 안보상황은 녹록하지 않다. 벌써 프랑스 체육부장관이 불참을 시사했다가 번복하는 등 각국 체육계 역시 불안함을 감추지 않고 있다. 평창은 휴전선에서 불과 100㎞도 떨어져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반도 위기는 한국전쟁 이후 가장 가팔라지고 있다. “북한을 완전히 파괴할 것”이라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협박과, ‘사상 최고의 초강경 대응조치 단행’을 검토하겠다는 김정은 위원장의 위협이 맞부딪쳐 쇳소리를 내고 있는 형국이다. 정치는 종종 ‘평화의 제전’을 망쳤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1984년 LA올림픽에서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은 각각 불참했다. 북한과의 관계에서 정서적 접근은 낭패로 귀결되기 십상이다. 30년 전 북한은 서울 올림픽에 불참했다. 2002년 월드컵 기간에는 제2 연평해전이 일어났다.
문재인 정부가 취임 이후 북한의 참가를 거듭 촉구하고 있는 것도, IOC가 렴-김의 선전 이전에 북한 선수들 중 누구도 올림픽 출전권을 얻지 못하자 IOC는 와일드 카드 발급을 검토한 것도 그 때문이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IOC는 올림픽 출전권이 걸린 국제대회에 참가하는 북한 선수들에게 장비와 여행 및 숙박경비를 지원하고 있다.
겨울이면 얼어붙은 대동강에서 아이스하키 경기를 할 수 있는 평양은 한반도 동계스포츠의 본향이기도 하다. “우리가 올림픽 출전 자격을 얻을 수있을까요?” 렴대옥과 김주식이 캐나다인 코치 브루노에게 수 없이 물었던 질문이었다고 한다. 렴대옥과 김주식은 프리 스케이팅을 마친 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두 손을 번쩍 치켜 올렸다. 렴대옥은 “세계 챔피언이 될 때까지 계속 노력하고 싶다”고 말했다. 군사적 대치이건, 외교적 경쟁이건 북이 시작하면 남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국제사회도 마찬가지다. 도전에 응전할 것이다. 하지만 올림픽은 기껏해야 빙판 위에서 자웅을 겨루는 싸움이 아니던가.
북이여, 오라. 평창에서 한번 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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