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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오늘

핵무기 사이에 두고 직간접 대화 나눠온 북미, 70년 역사의 종착점이 다가오는가

by gino's 2018.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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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정상회담을 나흘 앞둔 지난 8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모습으로 분장한 배우들이  싱가포르 매리언파크에서 역사적인 포옹을 나누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먼 길을 돌아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12일 싱가포르 센토사섬의 카펠라 호텔에서 대좌한다. 한국전쟁 뒤 꼬박 65년이 걸려 마련된 자리다.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 기간과 관련해 “이틀 정도”라고 밝혔다. 북한과 미국이 고위급 대화 자리를 처음 가진 것은 1992년 1월22일 뉴욕에서였다. 김용순 북한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가 아널드 캔터 국무부 정무차관을 만나 북·미 수교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2000년 말 빌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은 무산됐다. 북·미관계 정상화와 한반도 냉전체제의 평화체제 전환은 대미관계에서 북한이 주장해온 일관된 목표였다. 


1950년 ‘트루먼의 원자탄 공갈’

북 외무성 비망록에 정서 담겨
방어용 핵무기 개발 모순 잉태
비핵화까지 다단계 협상 예고

북한은 적대시정책 청산 바라
정치·안보·경제적 종식 제시
트럼프는 ‘종전선언’에 방점
체제안전보장 협상 진척 더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트럼프 대통령의 모습은 지난 5월17일 워싱턴에서, 김 위원장의 사진은 지난 4월27일 판문점에서 각각 촬영된 것이다. 로이터연합뉴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들의 핵 개발은 핵무기 보유로 완결되는 구조가 아니다. “우리에 대한 미국의 핵위협을 완전히 종식시킬 것을 목표로 내세운 가장 철저한 비핵화”(2013년 6월16일 국방위 중대담화)이기 때문이다. 당시 북한 국방위원회는 미국에 고위급 대화를 제안하면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비핵화의 개념을 이처럼 밝혔다. 한마디로 핵으로 핵위협을 없애겠다는 논리다. “우리의 핵 보유는 조선반도의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한 자위적이며 전략적인 선택”이라는 말에서도 드러난다. 북한과 핵무기, 북한과 미국의 관계는 각각 독립변수가 아니다. 핵을 사이에 놓고 북한과 미국이 직간접 대화를 해왔다고 해도 크게 어긋난 말은 아닐 것이다. 조선반도의 비핵화를 주장하면서 지금까지 6차례의 핵실험과 핵탄두 운반수단(탄도미사일)을 개발해온 모순 위에 한반도의 안보 현실이 놓여 있다. 북한에 핵과 미국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져왔으며, 싱가포르 북·미 대좌 이후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원자탄 피난민’의 트라우마


북한이 핵무기에 대한 입장을 공식적으로 내놓은 것은 2010년 4월21일의 외무성 비망록 ‘조선반도와 핵’에서다. 핵에 대한 원초적 정서가 담겨 있다. 그 열쇳말이 ‘원자탄 피난민’이다. 비망록은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일본인 다음으로 많은 사상자를 낸 우리 민족에게 핵의 악몽을 일깨운 것은 1950년 미국 대통령 트루먼의 ‘원자탄 공갈’이었다”고 전한다. 이어 “조선 북부에 동해로부터 서해에 이르는 방사능복도지대를 형성할 것이다. 그 지대 안에서는 60년 혹은 120년 동안 생명체가 소생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더글러스 맥아더 미 극동군 사령관의 말을 고스란히 옮겨놓았다. 트루먼과 맥아더의 핵위협은 전쟁 중 수많은 ‘원자탄 피난민’을 낳았다. 가족이 함께 움직일 수 없는 많은 집에서 대를 이으려는 일념으로 남편이나 아들만이라도 남쪽으로 피란 보냈고, 그 때문에 수백만명의 이산가족이 생겼다.


비망록은 이후 1969년 ‘포커스 레티너’로 시작해 ‘프리덤볼트’ ‘팀스피리트’ ‘연합전시증원연습’을 거쳐 ‘키 리졸브’ ‘독수리 훈련’과 ‘을지프리덤가디언’으로 이어져온 한·미 합동훈련을 통한 핵전쟁 연습을 원흉으로 지목한다. “전후에 태어난 세대들도 핵 화약내를 맡으며 자란 것이 바로 조선반도의 엄연한 핵 현실”이라는 것이다.



북·미 정상회담 장소로 낙점된 싱가포르 카펠라 호텔 전경. 로이터/연합뉴스



핵전쟁을 억제하기 위해 핵을 개발했다는 논리의 출발점이다. 비망록은 “우리는 필요한 만큼 핵무기를 생산할 것이지만, 다른 핵 보유국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핵 군축 노력에 참가하겠다”는 다짐으로 끝을 맺었다. “조선반도의 비핵화는 위대한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며 공화국 정부의 시종일관한 입장”이라던 비핵화 원칙이 공식적으로 사라진 것은 2012년 신년 공동사설에서부터다. 오래가지는 않았다. 미국이 1990년대 전술핵 철수 이후 처음으로 2013년 2월 한반도 주변에 핵자산을 반입해 군사연습을 하기 시작하자 같은해 6월 미국에 고위급 대화를 제안했다. 2016년 7월6일 공화국 정부 대변인 성명에서는 한반도 비핵화의 ‘원칙적 요구’를 제시했다. 남한 내 모든 핵무기 공개, 남한 내 모든 핵기지 철폐·검증, 핵타격 수단의 한반도 및 주변 반입 금지, 핵전쟁의 위협공갈 중단 또는 핵 불사용 확약, 남조선에서 핵사용권을 쥐고 있는 미군의 철수 선포 등 5가지다.


■‘버리기 위해 개발했다’는 아이러니


북·미 정상회담의 관심은 온통 비핵화에 쏠려 있지만 북한 입장은 다르다. 비핵화를 논의하겠지만, 그보다 ‘수십년에 걸친 적대와 불신의 관계를 청산하고 조·미관계 개선의 새로운 이정표를 마련하는’ 자리다. 지난 5월25일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의 담화에서 규정한 정상회담의 의미다. 비핵화의 대가로 북한이 원하는 것은 미국이 대북 적대시정책을 끝내는 것이다. 종전선언보다 큰 개념이다. 미국의 북한 전문 온라인 매체 38노스 운영자 조엘 위트가 지난달 애틀랜틱 기고문에서 북한의 입장을 잘 정리했다. 자신이 2013년 방북했을 당시 북한 당국자들에게서 들은 적대시정책의 종식은 정치적·안보적·경제적 종식의 세 부문으로 나뉜다는 것이다. 정치적 부문은 미국이 북한을 주권국가로 인정하고 외교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안보적 부문은 한국전쟁을 종식하고 정전협정 체제를 항구적인 평화협정 체제로 전환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경제적 부문은 교역 제한은 물론 한국전쟁 이후 부과된 온갖 규제들을 푸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은 이 세 가지를 하나로 통합해 비핵화와 함께 진행하되 단계적으로 풀어나가기를 바란다. 단계마다 북·미 양국이 동보적인 조치들을 취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위트는 이러한 점에 비춰볼 때 비핵화의 긴 과정에서는 다단계적 조치들이 필요하다는 수전 손턴 국무부 동아·태차관보 대행의 접근방식이 유효하다고 덧붙였다.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를 비롯해 상원의 민주당 지도부 7명이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지난 4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낸 공개서한. 핵과 생화학무기 등 모든 대량살상무기(WMD)의 제거 및 모든 종류의 우주발사의 금지, 무제한 사찰 등을 전제조건으로 요구하고 있다. 



북한이 국가핵무력의 완성을 선언한 것은 지난해 11월29일이다. 방북 우리 측 특사단을 통해 북·미 정상회담을 우회 제안한 것은 3월 초이며, 4·27 판문점선언에 ‘완전한 비핵화’를 명시했다. 북한 주장대로라면 미국의 정치적·안보적·경제적 적대시정책이 종식된다면 비핵화를 하지 못할 것도 없으며, 그 경우 ‘버리기 위해 핵을 만들었다’는 모순된 가정이 현실이 될 수 있다. 실제로 북한은 국가핵무력 완성 선포 직후부터 대남, 대미 대화 제의와 핵·미사일 모라토리엄 선언,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등을 통해 선도적 비핵화를 시작했다.


■여전히 가파른 ‘의사당 언덕’


북·미는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의 두 차례 방북과 김영철 북한 노동당 대남담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의 한 차례 방미의 준비과정에서 비핵화와 관계 정상화의 의지를 다짐했다. 판문점 통일각에서는 지난 6일까지 6번의 마라톤 협상이 계속됐다. 싱가포르 정상회담이 성공 스토리가 되려면 비핵화와 마찬가지로 북·미관계 정상화의 밑그림이 제시되고 곧바로 실행단계에 접어들어야만 한다. 들려오는 바에 따르면 비핵화에서는 다소 진전이 있지만, 북한의 체제안전 보장 문제는 진척이 더디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종전선언을 강조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것 외에는 딱히 현시점에서 내놓을 보상안이 없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어떤 경우의 수를 조합하더라도, 미국이 상응하는 조치를 내놓지 않는다면 비핵화의 메뉴 역시 소박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6일 싱가포르의 한 레스토랑 입구에 붙은 김치·쇠고기 요리 포스터. 말풍선 속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건식숙성한 미국산 쇠고기를 사용하다니 놀라운걸! 하모니(조화)를 다시 위대하게!”라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김치는 우리의 민족적 자랑! 미국산 쇠고기의 지구촌 판매를 분명 도울 것!”이라고 각각 적어놓았다. 트럼프 대통령의 대사는 선거구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에서 ‘미국’을 ‘하모니’로 바꿔놓은 것이다. 싱가포르/EPA연합뉴스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최근 북한에 대한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체제 보장(CVIG)를 언급하며 이를 조약 형태로 만들어 의회 비준을 받겠다고 밝혔다고 한다. 조약은 상원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일단 비준을 받으면 뒤집기도 어렵지만 비준 자체가 녹록지 않다. 하지만 올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미국 의회의 사정은 그리 만만치 않다. 당장 싱가포르 회담이 끝난 뒤 하한기와 함께 선거체제로 전환된다. 북한이 요구한 체제안전 보장과 관련해 의회가 올해 말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면, 비핵화 부문에서의 담대한 조치를 기대하기 쉽지 않다. 상원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다.

상원 원내대표 척 슈머, 외교관계위원회 간사 로버트 메넨데스, 상원 원내부대표 리처드 더빈 등 민주당 상원 지도부 7명이 트럼프에게 보낸 지난 4일자 공개서한에서 요구한 북·미 회담의 전제는 합의안의 의회 통과가 험로를 걷게 될 것임을 예고한다.


조건은 5가지로, △모든 핵·화학·생물학 무기의 제거 △CVID 및 핵물질 및 핵기술의 수출 금지 △우주발사를 포함한 탄도미사일 시험발사 중단 △핵 및 탄도미사일 프로그램, 생화학무기 프로그램과 관련된 신고 또는 미신고 시설에 대해 ‘언제, 어디서든’ 무제한 사찰 △영구적인 CVID 합의 등이다. 인권문제를 제외하면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ABC방송 인터뷰를 통해 밝힌 요구들과 큰 차이가 없다. 서한은 또 한국과 일본 등 지역 동맹국들과의 관계를 저해하는 어떠한 양보도 있어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일본이 납치자 문제 또는 중·단거리 탄도미사일 폐기 등을 강하게 주장할 경우 난관에 부딪힐 수 있는 대목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이틀전인 지난 6월10일 평양 공항에서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 오른손을 들어보이고 있다. 전용기 참매1호가 아닌 중국 국제항공의 보잉747기로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배부한 사진이다. EPA연합뉴스



■‘싱가포르 이후’ 비로소 시작될 동아시아의 새로운 여정


싱가포르 회담이 어떤 결과를 내놓건 결렬되지 않고 후속 회담으로 이어진다면 주로 북·미 간에 비핵화와 북한 체제 보장을 의제로 진행했던 논의는 확대된다. 종전선언으로 한반도의 냉전구조를 해체하는 것도 쉬운 길은 아니지만 싱가포르 이후에는 그 해체 이후에 새로운 질서를 어떻게 마련할 것이냐에 대한 동아시아 차원의 논의가 시작돼야 한다. 필연적으로 한·미동맹의 성격, 주한미군의 역할에 대한 다자간 논의도 포함될 수밖에 없다. 길이 끝난 곳에서 여행은 시작된다. 싱가포르에서 북·미 대화의 막이 오른 뒤 펼쳐질 미답의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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