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주 알리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발행인이 지난 10일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 5층 여적향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석우 기자
지난봄부터 한반도 안팎에서 일고 있는 변화는 남북한과 미국 및 주변 국가들만의 관심사가 아니다. 세계적인 이목을 끌고 있다. 전형적인 프랑스의 진보적 지식인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창간 10년을 맞아 내한한 세르주 알리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발행인 겸 편집인에게 대화를 청한 연유다. 지난 10일 경향신문사 여적향에서 만난 그는 도널드 트럼프라는 ‘예외적인 미국 대통령’ 덕에 오히려 한반도 평화의 전망이 밝다고 내다봤다.
다만 차기 미국 대통령이 누가 되건 돌이킬 수 없도록 가급적 빨리 협상을 진행해야 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인터뷰는 같은 날 서울 세종로 한·중·일 3국 협력사무국(TCS) 국제회의장에서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과 한반도 평화’를 주제로 열렸던 그와 문정인 대통령통일외교안보 특별보좌관의 대담과 맞물려 진행됐다. 극우 포퓰리즘이 극성을 부리는 프랑스의 고민도 들어보았다. 다음은 일문일답.
- 남북 간의 군사적 충돌 가능성을 없애기로 한 9월 평양공동선언을 어떻게 평가하나.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1971년 미국과 중국이 탁구나 치는 것 같더니 이듬해 리처드 닉슨이 베이징에서 마오쩌둥을 만난 것과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
- 남북정상회담은 물론 북·중, 북·미 정상회담도 이어지고 있다.
“모든 정상회담은 언론에 발표할 합의 내용을 내놓는다. 정상회담 자체보다는 정상회담이 계속 열리는 한 합의가 있을 것이고, 진전이 계속될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러한 역동성을 주는 것만으로도 회담은 긍정적이다.”
일본에 20년 불황 야기한
미·일 플라자 합의 기억을
중국 위협이 문제된다면
인도 등 중 접경국들과
공동방위체제 만들 수도
북·미 간 협상의 미래를 어떻게 보는가.
“도널드 트럼프(그는 한차례도 ‘대통령’이란 호칭을 붙이지 않았다)는 자신을 ‘A+ 대통령’이라고 자화자찬한 바 있다. 전직 대통령들에게 강한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다. 다른 대통령들이 한반도에서 하지 못한 것을 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오바마가 이란 핵 문제 해결에 실패하고, 북한 핵 문제에서 합의안을 도출했었다면, 역으로 이란 핵 문제 해결에 나서고, 북핵 문제 합의안을 깼을 것이다. 몇달 뒤 그가 협상을 깬다면 스스로 ‘사랑에 빠졌다’고 말했던 김정은 위원장에게 속았음을 자인하게 되는 꼴이다. 트럼프는 성공해야만 하는 이유가 더 많다.”
- 트럼프는 파리기후협정이나 이란 핵합의 등을 이미 깬 바 있다. 그 경우 현재의 진전은 언제든지 뒤로 갈 수 있는 것 아닌가.
“뒤로 물러선다면 어디로 물러설 것인가. 다시 대치국면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아주 낮아 보인다. 물론 미국에는 해외 개입을 선호하고 5대륙에 헤게모니를 행사하려는 군산복합체가 있다. 트럼프 시대에는 ‘정부 안의 정부(Deep State)’라고 불린다. 그들은 어떠한 대북 제재 완화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가 몇달 내 진전을 이룬다면 누구라도 돌아킬 수 없는 지점을 지나게 될 것이다. 차기 미국 대통령도 번복하지 못한다. 특히 남북 간 합의를 미국이 번복하기는 아주 어려울 것이다. 이를 위해서도 진전은 빠를수록 좋다.”
- 북한은 핵·미사일 시험을 중단하고 풍계리 핵실험장을 폐쇄했다. 반면 미국은 한·미 연합훈련을 유예한 것 말고는 어떠한 상응조치도 취하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있다.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미국은 적어도 남북대화를 가로막지 않고 있다. 한발 물러서 있다. 그 자체도 의미가 있다고 본다. 트럼프가 민주주의에 연연하지 않는 것도 한반도에는 좋은 점이다. 미국이 한반도 평화 과정에서 이탈하려 한다면 북한의 반민주적인 관행은 좋은 빌미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트럼프에게는 장애가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정상회담 계속 열리는 한
진전·변화 이어갈 수 있어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게
가급적 빨리 협상 진행해야
- 트럼프 행정부가 북·미 간 합의를 조약화한다면 미국 상원의 비준 가능성을 어떻게 보는가.
“미국 상원이 중대한 외교사안을 반대한 경우는 많지 않다. 오바마는 상원을 장악한 공화당의 반대를 우려해 이란 핵합의를 조약화하지 못했지만 트럼프는 어려움이 없다. 공화당 의원 대부분과 민주당 의원 상당수가 지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 한국 내에서는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한 뒤에도 주한미군이 역할과 지위를 바꿔 주둔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다. 역대 북한 지도자들 역시 미군 주둔을 용인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이해하기 어렵다. 소련 위협이 없어진 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필요 없어진 것처럼 북한 위협이 없어진 뒤 미군 주둔은 필요하지 않다. 한국이 미국의 속국인가. 미국은 군대 주둔에 반드시 대가를 요구한다. 일본은 1980년대 ‘플라자 합의’로 20년 불황을 맞았고, 1990년대 미국의 걸프전에 수십억달러의 전비를 대지 않았나. 그런 처지를 원하나. 미군의 족적이 줄어들수록 세계는 더 나아질 것이다.”
- 미군 철수 뒤 중국의 대한반도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
“베트남은 1979년 중국과 전쟁까지 치렀지만 어떠한 베트남 지도자도 지난 40년 동안 ‘중국의 위협 탓에 미군 주둔이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관계가 긴밀해졌다. 베트남이 미국 경제모델을 받아들임으로써 독립성을 잃었다는 지적(놈 촘스키)까지 제기된다. 통일 한국이 중국 견제를 위해 미군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너무 성급한 결론이다.”
- 중국은 14개 접경국가들 중에서 민주주의 국가가 생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며, 그 때문에 한반도 통일을 원치 않는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중국 주변국 중에서 중국을 진정 좋아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비우호적인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게 중국의 가장 큰 약점 중 하나다. 중국이 걱정되면 일본과 인도, 베트남 등 주변 국가들과 공동안보시스템을 구축하면 될 일이다. 강력한 접경국가인 인도에 일종의 완충(buffer) 역할을 맡길 수도 있을 것이다. 1962년 중국과 전쟁을 치르기도 한 인도 역시 중국을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공동안보시스템을 만들기 전에 중국이 실제로 위협인지 결정해야 할 것이다.”
- 트럼프는 오바마의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를 대체한 ‘인도·태평양 전략’을 내놓았다.
“그걸 전략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마 누군가 써준 것을 읽었을 것이다. 트럼프와 일대일로 만날 기회가 있다면 한번 물어보길 바란다. 아무것도 모를 게 분명하다. 트럼프는 교역적자를 메우는 데만 관심이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이데올로기는 교역, 교역, 교역이다.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중국과 함께 양대 화두다.”
- 한국 내에도 북한과의 협상에서 성공하길 바라지 않는 반공세력이 적지 않다.
“상당히 흥미롭다. 한국에 오는 동안 브라질 대선에서 당선이 유력해진 극우 자이르 보우소나루 후보 역시 유세 도중 반공을 말했다. 시대에 뒤떨어진 구호다. 작금에 세계에는 공산주의가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에 대한 도전이 제기되고 있지 않나.”
- 프랑스 역시 극우 포퓰리즘이 세를 넓히고 있다. 지난해 당선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이 문제를 어떻게 대처하고 있나. 프랑스 유권자들은 아마도 ‘프랑스 병’을 치유할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다. 마크롱이 당선된 것은 그가 기성 정치권의 아웃사이더였기 때문이다. 트럼프나 보우소나루 후보와 공통점이다. 마크롱은 ‘나는 좌도, 우도 아니다. 새 정당을 만들 것’이라고, 트럼프는 ‘나는 정치인이었던 적이 한번도 없으며 지금도 아니다’라고 각각 주장했다. 보우소나루는 군인 출신인 점만 강조한다. 마크롱은 그러한 정체불명의 모호함 덕에 당선됐다. 하지만 집권 뒤 지지율이 급락한 것은 주로 중도우파 정책을 내놓으면서 그러한 모호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 마크롱은 그래도 기성 정치권이 못한 걸 하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나.
“신자유주의가 만든 정치구조는 좌파이건 우파이건 정권을 잡은 뒤 똑같은 경제정책을 내놓게 만들었다. 유권자들은 변화를 바라며 투표를 했건만 좌도, 우도 충족시키지 못하면서 기성 정치를 떠났다. 마크롱에게는 결국 중도우파 지지자들만 남을 것이다. 문제는 중도우파가 프랑스에서 소수파라는 점이다.
왕후이 칭화대 교수 (1) | 2019.04.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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