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쿠바정책 전환 방침을 발표한 지난 6월16일 아바나 시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선인장에 걸터앉아 어줍잖은 표정을 짓고 있는 벽그림 앞으로 모녀가 지나가고 있다. 아바나/AP연합뉴스
■2년 만에 다시 멀어진 쿠바 여행
노년의 미국인들이 꿈의 여정으로 꼽는 여행지의 하나는 쿠바의 아바나라고 한다. 1959년 쿠바 혁명 이전까지 미국 자본의 텃밭이었던 아바나를 거쳐 카리브해의 발라데로 해변에 몸을 담그는 일정이다. 분단 이전 서울 시민들이 경원선에 몸을 싣고 달려갔던 금강산~원산 명사십리 해수욕장 일정을 연상케 한다. 쿠바 여행이 불가능해지면서 미국인들이 멕시코 칸쿤이나 바하마 등 카리브해의 다른 휴양지를 찾았던 것도, 금강산~명사십리 대신에 설악산~낙산을 택했던 우리와 비슷하다.우리에게 경원선 휴가는 여전히 꿈지만, 미국인들은 2년 전부터 아바나 여행을 할 수있게 됐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여행 자유화 조치를 내렸기 때문이다. 평범한 미국인들이 어렵사리 얻은 쿠바 여행의 전망이 어두워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주 쿠바정책 U턴 방침을 발표한 탓이다. 트럼프가 취임 뒤 오바마의 정책을 뒤집은 것은 처음이 아니다. 하지만 쿠바 정책 전환 방침은 트럼프가 특별한 소신을 갖고 밀어붙였다기 보다는 여전히 냉전의 틀에 머문 미국 내 극렬보수 쿠바인 공동체의 주문이었다. 트럼프가 쿠바정책을 발표한 지난 6월16일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리틀 아바나’의 한 극장에서 병풍처럼 대동하고 등장했던 마르코 루비오 상원의원(공화·플로리다)과 반공보수 쿠바인 단체 지도자들이 그 증거다. 우리의 이념갈등이 금강산 방문길을 막았듯이 쿠바계 미국인들의 내부갈등이 꿈의 여정에 재를 뿌린 것이다.
쿠바 관광 홍보 포스터 / 에어비앤비
■아바나 시내서 출입금지 카페, 레스토랑, 호텔을 피해다녀야 할 판
“거의 60년 동안 쿠바 국민들은 공산주의 지배 아래서 고통을 당해왔다. 전임 (오바마) 행정부가 여행과 교역 제한을 완화한 것은 쿠바 국민이 아닌, 쿠바 정권만 부유하게 했다.” 트럼프의 리틀 아바나 연설은 장광설과 달리 오바마 정책의 전면폐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대사급관계 정상화와 항공·해운·우편·금융거래 재개, 미국인의 여행자유화 등의 뼈대를 유지했다. 미국 기업의 쿠바 투자를 원점 재검토하고 쿠바 정부와 연계된 기업 및 단체와의 금융거래나 일반거래를 금지했다. 구체적인 조치는 재무·국무·법무부 등의 검토를 거쳐 최장 90일 뒤에나 윤곽이 잡힌다. 무엇보다 쿠바 내 모든 소매점 체인과 57개 호텔·여행사·레스토랑 등을 소유, 쿠바 경제의 40% 정도를 점유하는 군부기업 가에사(GAESA)를 정조준한 것이 트럼프 구상의 핵심이다. 트럼프는 쿠바의 인권실태를 평가해서 추가 제재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단서를 달았다. 인권은 숭고한 가치다. 하지만 조지 부시 미국 행정부가 그랬듯이 현실정치의 손을 타면 ‘체제전복’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라울 카스트로의 쿠바 정부는 ‘혁명정부성명’을 내고 “양국간 현안에 대한 미국 정부와의 협상은 물론 상호이해를 위한 대화와 협력을 계속해나갈 용의가 있음을 거듭 밝힌다”고 응수했다. 다만, 1962년 이후 미국의 쿠바봉쇄 전략이 가져온 파괴적인 결과를 지적하면서 “쿠바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시스템을 바꾸겠다는 전략은 실패할 것”이라고 못박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6월16일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의 한 극장에서 쿠바정책 재검토를 담은 행정명령에 서명한 뒤 들어보이고 있다. 뒷열 왼쪽부터 마리오 디아즈 발라르 하원의원(공화·플로리다)과 락 스콧 플로리다 주지사, 쿠바 망명단체 지도자,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둘러서서 찬사를 보내고 있다. 마이애미/AP연합뉴스
■“카스트로 타도!” 쿠바인 망명자들의 여전한 냉전적 사고
트럼프의 조치들이 그대로 시행된다면 평범한 미국인들의 쿠바 여행에 영향을 미치는 대목은 크게 두가지다. 우선 쿠바여행을 라이센스를 받은 미국 기업이 주관하는 단체관광으로 제한했다. 또 가에사가 운영하는 호텔이나 여행사, 숙소 등을 사용해선 안된다. 일례로 아바나 시내관광을 하더라도 수백개, 수천개의 레스토랑과 카페, 호텔 중에서 가에다가 소유한 곳을 피해다녀야 한다. 초등학교 소풍을 인솔한 교사가 학생들에게 일일이 갈 곳과 가지 못할 곳을 알려줘야 하는 우스꽝스러운 상황도 생길 것이다. 이런 불편을 감수할 사람은 많지 않다. 여행비용이 오르는 것은 물론, 자칫하면 범법자가 될 위험도 있다. 미국인 여행객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미국은 국민과 정부를 분리한다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트럼프의 리틀 아바나 연설도 쿠바 정부는 비난하면서도 쿠바 국민에겐 우애를 표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쿠바의 길바닥 경제는 다소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고, 관광수요 확대로 보다 나은 삶을 꿈꾸던 쿠바인들의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질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트럼프는 왜 이런 정책방침을 내놓았을까.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대 쿠바 화해정책의 기운이 무르익던 2014년 12월 19일 아바나의 한 주민이 발코니아 성조기와 쿠바 국기를 나란히 걸어놓고 있다. 평범한 쿠바인들에게 미국은 더이상 적성국가가 아니다. 아바나/AP연합뉴스
■인구 170만명에 연방의원 7명, ‘카리브해의 유태인들’
1990년대부터 쿠바와와 관계 정상화를 요구해온 것은 민주당이 아니었다. 재계 이익을 대변해온 공화당 주류와 미국 상공회의소가 공개적으로 요구해왔다. 유럽 각국과 캐나다가 쿠바에 다가가던 시절 미국만 뒤쳐질 수없다는 사업적 마인드에서 비롯된 요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쿠바 관계를 봉쇄해온 것은 미국 내 보수 쿠바인 공동체였다. 미국 내 인구 178만여명(2015년 센서스)인 쿠바계는 한국계(170여만명)과 비슷한 규모이지만 정치적 입김은 차원이 다르다. 연방 상·하원에 단 1명의 한국계 의원도 없는 반면에 쿠바계는 7명에 달한다. 루비오를 비롯해 상원에만 밥 메넨데스(민주·뉴저지), 테드 크루즈(공화·텍사스)의원이 있다. 하원에는 외교관계위원장을 지낸 일레나 로스레티넨(공화·플로리다), 알렉스 무니(공화·웨스트 버지니아), 카를로스 쿠벨로(공화·플로리다), 알비오 시레스(민주·뉴저지) 등 4명이다. 공화당 상원의원 2명은 모두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갔던 인물들이다. 전직 상·하의원 5명도 전원 플로리다 출신이다.
유대인 다음으로 과잉대표(over-represented)됐다는 점에서 쿠바계 미국인은 ‘카리브해의 유대인’이라고 불린다. 120여만명이 플로리다에 집중 거주함에 따라 표의 응집력이 강하고, 이를 반 카스트로 로비에 활용해왔다. 2000년 미국 대선에서 앨 고어 민주당 후보가 플로리다 재검표에서 탈락했듯이 공화당으론 절대 무시할 수없는 세력이다. 조지 부시 행정부에서 관계정상화 또는 교역재개를 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마이애미 마누엘 아트타임 극장에서 쿠바정책 재검토를 발표하던 지난 6월16일 극장 밖에서 쿠바정책의 변화에 반대하는 쿠바계 주민들이 반 트럼프 시위를 벌이고 있다. 마이애미/AP연합뉴스
■반공 보수는 있는데 진보는 없는 이상한 이념갈등
냉전의 짙은 그림자도 세월을 이기지는 못한다. 오바마가 쿠바와 관계정상화를 추진한 것은 2008년 대선에서 쿠바계가 민주, 공화당에 거의 비슷하게 표를 던진데다가 세대교체로 인해 선대(先代)의 이념갈등에 무관심한 쿠바계가 늘어났다는 판단에서였다. 미국 내 쿠바인들 사이의 보·혁 갈등은 사실상 사라지고 있다. 마이애미의 반공보수층은 여전히 카스트로 체제에 증오를 내보이고 있지만, 쿠바와의 관계개선을 희망하는 계층은 진보주의자들이 아니다. 비지니스계의 실용주의자들이다. 트럼프는 그 중간의 어정쩡한 입장에서 정책 재검토 방침을 내놓은 것이다. 반공보수의 목소리를 전면 수용했다면 자유를 찾아 탈출하도록 쿠바인들을 유도했던 ‘젖은 발-마른 발(Wet Foot-Dry Foot) 정책’을 재도입했어야 했다. 그러나 트럼프는 재도입하지 않겠다고 명시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왼쪽)과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 2016년 3월21일 아바나의 혁명궁전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손을 맞잡아 올리고 있다. 아바나/AP연합뉴스
■아바나의 택시운전사, “우리 쿠바 사람들은 늘 괜찮다…”
쿠바와의 비지니스 확대를 추구하는 P&G와 비아콤, 허니웰, 초이스 호텔 등의 업체들이 후원하는 민간단체 ‘인게이지 쿠바(Engage Cuba)’의 메델라인 루삭 대변인은 뉴욕타임스에 “쿠바의 사업가들을 어렵게 할 뿐 아니라 혼란스로운 정책 탓에 미국인들의 쿠바 여행수요를 질식시킬 것”이라고 짚었다. 반면에 마이애미의 반공보수단체 쿠바 민주위원회(CDD)는 “(오바마의)쿠바 정권에 대한 일방적인 양보는 쿠바 국민에 대한 압제를 더욱 대담하게 할 뿐”이라면서 환영했다. 지난해 61만4433명(쿠바계 미국인 32만9496명 포함)의 미국인이 쿠바를 찾았다. 전체 외국인 관광객은 같은해 처음으로 400만명을 돌파했다. 옛 소련블록이 무너진 뒤 혹독한 '고난의 시기'를 건너온 쿠바인들은 그럼에도 낙천적이다. 뉴욕타임스가 만난 택시 자영업자는 “우리 쿠바인들은 늘 괜찮다”고 말했다.
가에사가 운영하는 대형호텔을 피할 방법은 있다. 이미 에어비앤비는 쿠바 내 2만2000개의 민박집을 확보해놓고 최대 50만명을 수용할 수 있다. 하지만 단체관광 만 가능해진다면 여러개의 민박집으로 나뉘어 잠을 자고, 아침에 다시 모여 가이드 투어를 해야 한다. 이르면 올 가을부터 벌어지게 될 풍경이다. 트럼프가 21세기 한복판에 내놓은 냉전 발상의 부수적 피해가 엉뚱한 방향으로 튀게 된 것이다. 트럼프의 미국과 달리 유럽의회는 6월20일 유럽연합(EU)·쿠바 간에 정치대화와 협력을 약속하는 협정안을 압도적인 표차이(찬성 57, 반대 9)로 통과시켰다....
아바나 시내 한 공원의 노점상들.